청춘 다바친 바다, 최초라는 선물을 주다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바다를 개척하지 않으면 안돼."

배순태(92) ㈜흥해 회장은 80년 가까운 세월을 바다에 머물고 있다. 바다에서 꿈을 키운 16살 소년은 어느새 92세 백발 노인이 되었다. 그러나 쉼 없이 몰아치는 파도처럼 멈출 줄 모르는 그의 인생은 마치 바다를 닮아 있다.

'한국최초 세계일주 선장', '한국 최초 면허1호 도선사', '한국도선사협회 설립 및 초대 회장'. 이런 무수한 타이틀을 뒤로하고, 아직도 북극항해를 꿈꾸고 있는 배 회장의 바다와 인천항 이야기를 들어 본다.

▲ 인천항 갑문 시대를 열다

인천 그리고 인천항을 대표하는 것은 바로 갑문이었다. 갑문은 언제라도 하역이 가능한 정온수역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준다.

지난 1974년 완공된 인천항 갑문은 도선사인 배 회장에게는 또 다른 도전이었다. 어떤 선박이라도 이끌고 안전하게 갑문을 통과하는 것이 큰 숙제였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준공 전 갑문을 무사히 통과하라는 것이었다.

"당시에 갑문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에 처음이었지. 그래서 외국인 도선사를 초청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어. 잘못하다 사고라도 날 수 있다며 외국 선사들이 우리나라 도선사들을 믿지 못하겠다고 했으니까."

자칫 사고라도 발생하게 되면 그 파장은 당시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자존심을 건 배 회장은 우리나라 최초 갑문 도선을 시작했다.

한국 도선사 9호이자, 국가 공인 도선사 면허 1호인 배 회장의 자부심이 만들어 낸 결과다.

1974년 3월27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는 '여수호'를 이끌고 한국 최초 갑문 통과라는 새로운 바다 역사를 새겨 넣었다.

"보는 사람들도 불안 불안해 했지. 그래서 나는 태연한척 했는데 사실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 그동안 내가 쌓아왔던 경험들이 잘 발휘된 것 같아 기뻤지."

배 회장의 갑문 시험 통과 이후 40여일이 지난 5월10일 인천항 갑문은 정식 개통식을 열고, 내항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나에게 한국 최초라는 타이틀을 준 갑문 도선인데. 갑문 개통 40년이 됐지만 기념식 한번 없다는 것에 실망이 컸지. 갑문은 우리 경제 발전 상징이야."

▲ 인천항 인간 등대

흥해 사옥에는 한자로 '인간등대'라는 네 글자가 걸려 있다. 도선사로 인천항 안전을 책임지겠다는 그의 각오다.

뭐니뭐니해도 항만을 잘 아는 사람은 도선사일 수밖에 없다. 어느 곳에 암초가 있는지, 어느 지역 수심은 어떻게 되는지, 부두 특성은 어떤지 등을 잘 아는 이들이 도선사다.

이런 이유로 선박과 예선, 항만 여러 관계자들이 도선사 명령을 따라 움직인다. 그만큼 도선사의 판단은 항상 옳아야 한다.

"도선사로 34년을 일했지. 우리나라 최초로 시험에 합격한 도선사가 된 내가 항만에서 역할이 중요한 도선사들의 권익도 생각해야 했어. 1970년부터 한국도선사협회를 창립하려고 했지."

안전한 항만을 위한 도선사협회 창립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자신의 건물에 사무실을 만들어 내주며 전국에 있는 도선사들의 뜻을 모아야 했다. 결국 정부 지원 등을 이끌어 내면서 1974년 1월11일 한국도선사협회가 창립에 성공한다.

"협회를 만들었지만 살림살이가 넉넉하지는 않았지. 회비로 운영하는데 회비를 제대로 내는 사람이 얼마 없었거든. 내 사무실을 사무국으로 쓰면서 운영비가 없으면 내 돈은 내놓기도 했지."

배 회장은 인천, 인천항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올림픽 성화봉송 주자로 참여하는 영광도 누렸다.

"88서울올림픽 성화가 인천까지 왔지. 그때 누가 마지막 주자를 할 건지 관심이 높았어. 그런데 내가 된 거지. 10t짜리 자동차를 배 모형으로 꾸몄고, 인천항 도선사인 내가 최종 주자로 선정된 것야."

이 장면은 TV를 통해 전국에 전달됐다. 배 모형에 올라 흰 제복을 입고 성화를 들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한 서예가가 그를 찾아왔다. 그 모습에 감동했다며 써 준 글이 바로 '인간등대'였다. 그는 이 글귀를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 인천항이 답이다

1993년 2월26일 인천항 도선사를 정년 퇴임 한 그는 지금까지 그가 설립한 예인선 업체 ㈜흥해를 이끌고 있다.

도선사 활동 중에도 고려대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하며 또 다른 인생을 준비해 왔다. 자신이 타고 다지던 도선선을 수리하기 위해 그는 조선소를 인수,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조선소라고 하지만 철공소 수준에 지나지 않았지만,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예선까지 직접 건조하기에 이르렀다. 예선을 직접 만드는 등 예선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 1974년부터다. 실패도 있었다. 그러나 꾸준히 흑자를 내는 기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큰 욕심을 버린 탓이다.

"인천항에서 도선사는 끝을 냈지만 예선사업으로 또다시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야. "

지난 1996년 5월31일 열린 제1회 바다의 날 기념식에서 배 회장은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당시 최장수 인천항 도선사로 바다와 함께 해 온 공로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렇듯 그는 아직도 인천항에 남아 있다.

내항이 전부이던 인천항은 남항, 북항, 인천신항으로 확장됐다.

"인천신항이 개장한다기에 가 본적이 있지. 느낌이 이상하더라고. 내항 개장 40년 만에 지난해 송도에 인천신항이 문을 열었지. 우리 후배들이 잘 해줄 것이라고 믿어. 각자 불굴의 정신을 발휘해 인천항이 우리나라 제2, 제1 항구로 거듭나기를 바랄 뿐이야."

배 회장은 바다, 인천항에 대한 고마움을 늘 품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밥 먹고 살 수 있게 해준 곳이 바로 인천항이야. 또 바다는 나를 강하게 만들었지. 강한 파도가 치면 나는 더 강해져야 하니까. 어떤 어려움도 피하지 않고 극복하려는 정신이 필요한 것 같아."


/글=이은경 기자 lotto@incheonilbo.com
/사진=이상훈 인턴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