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집·골목 구석구석 살충제 방역 … 전염병 퇴치 전념
1949년 부평 등 뇌염환자 3명 사망 … '소독약 부족' 미국에 요청
우물물 불결 콜레라·장티푸스 걸리기도 … 불량 시설 정비나서
▲ 1960년대 인천 골목 구석구석을 방역하는 모습. 구경하는 아이들은 연막소독차가 등장하지 않은 것이 못내 섭섭한 표정이다. (최성연의 1960년대 인천풍경)
1949년 9월, 북한군 남침에 앞서 '모기'가 먼저 남한을 기습 공격했다.

개성에서 발병한 뇌염은 80여명의 사망자를 내고 서울로 남하해 70여 명을 숨지게 했다.

당시 인천시가 포함된 경기도에서만 9월10일 현재 700명 넘는 환자가 발병해 247명이 사망했다.

인천에서는 부평, 문학, 송림 등에서 뇌염 환자 8명이 발병해 3명이 사망했다.

한반도 전체가 모기 공격에 떨었다.

국무회의에서는 일주일간 국민학교 휴교를 긴급 결정했고 요정급 음식점은 모기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하는 하오 7시 이후 영업을 금지 시켰다.

시내 극장들도 뇌염이 수그러질 때까지 휴관을 단행했고 모든 열차는 안팎을 철저하게 소독하고 운행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소독약이 부족해 제대로 된 방역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 보건부장관은 유행성 뇌염모기의 박멸을 위해 주미 한국대사 장면을 동해 미국 정부 측에 소독약 원조를 요구했다.

장면은 인천 출신으로 후에 총리까지 지낸 인물이다.

13만t의 DDT가 부산항으로 들어왔고 정부는 급히 소독약을 공중 살포하는 한편 전국에 긴급 배포했다.

소독약은 왔지만 분무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인천시 보건계는 중앙에서 받은 뇌염방역 소독용 분무기 20개를 업소, 공장, 동회 등에 빌려 준다는 것을 공지했다.

희망자는 보건계를 방문해 차용증을 쓰고 빌리되 대여시간은 1개소 최고 3시간이었다.

인천 지역에서 발행되었던 대중일보는 1949년 9월8일자에 시민 계몽용 '뇌염 예방법'을 게재했다.

불필요한 못이나 유수지는 배수하거나 매몰할 것, 집집마다 모기장을 치거나 모기 없는 장소에서 잘 것, 저녁 외출을 금할 것, 저녁 목욕을 하지 말 것 등이었다.

뇌염 발생에 앞서 1946년 7월에 호열자(콜레라)가 온 나라에 퍼져 큰 피해를 봤다.

인천 시내로 전염병이 침범할 우려가 커지자 시장과 경찰서장은 '호열자 방역포고 제3호'를 포고한다.

여관이나 하숙집에서는 여행 금지구역에서 내방한 객으로서 검변(檢便, 대변검사) 증명서의 소지가 없을 시는 그 숙박을 거절할 것(위반 시 책임은 영업주), 여관업·하숙업·요리점·음식점·기생권번의 종업원은 필히 매주 1회씩 검변을 받을 것(검변 증명서는 1주간 유효하며 본 증명서가 없는 자에게는 취업을 정지시키고 검변 비용은 업자 각자의 부담으로 함) 등의 내용이었다, 당시 숙박을 하든 취업을 하든 꼭 소지해야할 가장 중요한 증명서는 바로 '대변 검사서'였다.

콜레라를 비롯한 장티푸스, 이질 등 대부분의 전염병은 불결한 식수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당시 남한 전역에서 사용하고 있는 우물은 공설, 사설 합쳐 20만 개소에 이르렀다.

전 국민의 90%는 시설이 불량한 우물을 통해 물을 마셨다.

6·25 전쟁이 끝나자마자 인천시는 우물부터 정비했다.

공동우물의 덮개와 지붕을 씌우기 위해 각 동에 목재와 시멘트를 배급했고 시 위생반 전원을 출동시켜 시내에 산재한 우물 1260개소에 소독을 실시했다.

더불어 인천시는 전염병을 옮기는 파리, 모기 등을 제거하기 위해 시내에 있는 돼지우리를 모조리 교외로 이전하도록 강력하게 조치한다.

만일 이에 응하지 않는 경우 '전염병예방령'에 의거해 발견 즉시 도살할 것을 경고한다.

70년대 들어오면서 방역 활동이 정착되고 시민들의 위생 관념이 높아지면서 전염병 발생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인천시사 70년대 편'에 의하면 "1970년도 장티푸스 459명, 콜레라 159명 등 639명 전염병 환자가 발생해 13명이 사망했던 것이 1972년과 1977년 그리고 1978년에는 환자 발생이 전무했으며 1979년에도 디프테리아 환자 2명이 발생해 치유됐을 정도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유동현 인천시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