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사진, 시간을 깨우다 (32)
▲ 1960년대 중반 동인천 역전 모습으로 인영극장과 별제과 건물이 눈에 띈다. 아직 지하상가가 들어서기 전으로 하얀 선은 지하도 건설 계획선이다.

축현역에서 동인천역까지 60년
본래 축현 불리우다 호칭 어려워 상인천으로 바꿔 … 광복후 동인천역 개명
1970년대 극장 즐비·상견례 주 장소 양과자점 사라져 … 대한서림은 남아


'동인천역'이란 이름이 붙은 지 올해로 60년이 되었다. 1899년 경인선 개통 당시 이름은 축현역이었다. 축현(杻峴)은 싸리재의 한자 이름이다. 위치는 흔히 '채미전'이라고 불렀던 지금의 동인천청과물시장이었다.

역이 생기자마자 승객이 계속 늘어나 역 시설을 확장해야만 했다. 매일 사용하는 역을 부수고 다시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1908년 아예 앞 쪽의 넓은 공터로 역을 옮겨 버린다. 그곳이 현재의 동인천역 자리이다.

'축현역'이라는 이름이 인천을 대표하지 못할 뿐 아니라 부르기도 어렵다는 여론이 일자 1926년 조선매일신문사는 역명을 공모했다. '상인천역' '동인천역' '인천중앙역' '신인천역' 등이 거론되었고 그 중 상인천과 동인천이 1, 2위로 선정되었다.

상인천은 종착점인 인천역과 인천부청의 위쪽이어서, 동인천은 역이 부청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선정되었다. 결국 축현역은 상인천역으로 바뀌었다.

광복 후 역명은 다시 바뀐다. 일본인들이 붙인 이름이 싫다고 해서 1948년 6월 1일 상인천역을 다시 축현역으로 환원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오는 사람들이 역 이름이 어렵다고 하자 1955년 축현역을 동인천역으로 바꿨다. 역 이름이 동인천역이 되면서 이 일대는 그때부터 인천을 대표하는 동인천 지역이 된다.

사진은 1960년대 중반 동인천역 앞쪽 모습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왼쪽의 인영(仁映)극장이다. 이 극장은 1941년 11월 기공식을 한 인천문화영화극장의 후신으로 동산고등학교를 설립한 이흥선 씨가 개관했다. 1952년 경매 입찰로 김 모 씨에게 불하되었다.

인천시장은 1962년 붕괴 위험 건물이라는 이유로 극장 개축 명령을 내렸다. 김 씨는 6·25 전쟁 때 포격으로 벽에 금이 간 단층 건물을 헐어버리고 2층 건물을 신축해 재개관했다. 지붕에 '인영극장'이라고 커다랗게 써놓았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인천에는 19개 극장이 있었다. 안방극장 TV와 레저 붐을 타고 서서히 극장들은 불황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3년 인영극장도 다른 업종으로 변경하기 위해 기존 2층 건물을 헐고 6층으로 새로 올렸다.

당시 인천에서는 가장 큰 '빌딩'으로 볼링장과 탁구장 등이 들어섰다. 후에 그 건물에는 서울신탁은행(현 하나은행)이 입주했다.

사진 오른쪽에는 당시 인천에서 보기 드문 '빌딩'이 우뚝 서있다. 가장 번화했던 동인천 지역에도 아직 이만한 규모의 빌딩이 세워지지 않았다. 이 빌딩은 별제과 건물이다. 1, 2층은 별제과점이며 3, 4층은 별다방 그리고 5층은 음악감상실이었다.

별제과는 결혼을 앞둔 양가부모의 상견례 자리였을 만큼 1970년대 당시 인천 최고의 '럭셔리' 양과자점이었다.

인천이 고향인 가수 송창식이 무명 시절 음악감상실에 가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1980년대 인기그룹 와일드캣츠의 리드싱어 임종임도 이곳의 단골이었다. 서울에 쎄시봉이 있다면 인천에는 별음악감상실이 있다고 할만 했다.

별제과 옆 2층 건물에는 1953년 문을 연 대한서림이 영업 중이다. 사업이 번창하자 대한서림은 1989년 별제과 건물을 매입, 이전해 신장개업했다. 그러나 서점은 세월을 이겨 내지 못했다. 2012년 8월부터 1, 2층을 빵가게에 내주고 3. 4층만 서점으로 운영하고 있다. 책방이 '책빵'이 된 것이다.

사진 위 하얀 선은 지하도 및 지하상가 건설 계획선이다. '1970년 시정백서'에 의하면 인천시는 연장 40m, 노폭 12m의 지하도를 개설함과 더불어 지하도 양측에 지하상가(점포당 100~120만원)를 조성하여 교통의 개선과 도시 면모의 쇄신을 꾀한다.

이에 따라 1972년 새동인천 지하상가가 개통되었고 이후 1974년 동인천, 1977년 중앙로, 1980년 인현, 1983년 신포지하상가가 차례로 건설된다. 지하상가 개통은 표면적으로 차량의 원활한 소통과 안전한 보행이 그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민방공 대피용 목적이 더 강했다.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