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800년경 이집트와 페르시아에 오늘의 테니스와 흡사한 경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테니스와 비슷한 포움이 행해졌다고 한다. 포움은 중세기까지 계속 귀족들간에 크게 유행했으며 루이10세와 찰스5세도 매우 애호했다고 한다. 그후 15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테니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874년 코트와 네트규격이 정해지고 이듬해 멜버른 크리켓 클럽에 의해 경기규칙이 제정되었다. 1877년 영국 크리켓 클럽이 윔블던에서 제1회 전영국선수권이 열리면서 급속하게 세계적으로 보급되었다. 1900년 미국인 데이비스가 직경 55㎝ 높이 40㎝로 당시 가격 5천달러의 순은제 컵을 기증하여 시작된 데이비스컵 쟁탈전은 오늘날 가장 권위있는 대회이다.

 테니스 코트에서의 가장 큰 영예는 그랜드슬램이다. 그랜드슬램이란 세계의 주요대회 즉 윔블던 전미 전불 전호주대회 단식에서의 석권을 말한다. 첫번 영예는 1935년 영국의 프레드릭 존 페리이며 여자로서 그랜드슬램 달성의 미국인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는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다. 그녀는 윔블던 단식에서만 9번 우승 가장 많은 상금을 받은 여성 스포츠계의 일인이 되었었다.

 사실 인천의 테니스도 30년대 야구와 함께 활발했었다. 신태범박사의 회고에 의하면 전 경인리스 함관수 사장의 부친 함병문씨는 수년간 전조선대회와 전일본학생대회 등에서 우승 인천의 영예를 떨쳤다고 한다. 부친의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함사장 형제 역시 우리나라 정구계의 왕자로서 세계무대에 까지명성을 날렸었다.

 귀족들의 경기였던 만큼 테니스는 신사의 스포츠라고 말한다. 정정당당한 신사적 태도와 에티켓을 존중하는 까닭이다. 경기장에서의 복장은 백색이어야 하고 훌륭한 플레이어에게는 「굿셧」이라는 칭호와 함께 박수를 보내 격려한다.

 중등교사들의 친교를 다지는 인하대총장배 테니스가 인천일보사의 후원으로 있었다. 인천테니스의 중흥을 가다듬는 대회였다. 「우리선생님 굿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