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21 「급월(汲月)의 교훈을 되새기며」수묵(樹默) 진홍섭(秦弘燮)


   
▲ 수묵 진홍섭 유영
개성 부유한 지주 아들로 태어나

황수영 등 친구와 함께 일본유학

고향 박물관서 우현과 만남 계기

광복 후 개성·경주박물관장 지내

미술동인회 결성 '고고미술' 창간

20년간 梨大 교수·박물관장 역임


▲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 '방황과 집착의 연속'

수묵(樹默) 진홍섭(秦弘燮, 1918~2010)은 우현 고유섭 선생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수묵은 역사학자 이기백 교수가 책임편집을 맡아 발행하는 『한국사시민강좌』라는 학술잡지에서 '연구생활의 회고'라는 주제의 원고 청탁을 받고 「급월(汲月)의 교훈을 새기며」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바 있다.

수묵 선생은 그 글에서 "順航(순항)과 逆境(역경)의 교차, 彷徨(방황)과 執着(집착)의 연속의 역정"이라고 자신의 인생역정을 표현하고 있다.

즉 몇 번의 인생의 갈림길에서 타의(他意)와 자의(自意)에 의해 삶을 선택하고 방황하였지만 끝내 스승인 '급월(汲月; 우현의 또 다른 아호)의 교훈을 되새기며' 미술사학자로서 그리고 교육자이며 '박물관 사람'으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수묵은 개성의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은 매우 유복하였다.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1918년에 개성 동행랑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의 귀한 아들로 태어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개성시가는 남대문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간선도로가 뚫리고 그중 북방으로 뚫린 길은 송악산 기슭에 자리잡은 궁전자리인 만월대까지 이르는데, 이 도로 좌우에 상가가 형성되고 대로 뒤에 이와 평행되는 뒷골목이 있어 이곳은 주택가이다.
이 동·서의 뒷골목이 고려 때에 세웠다는 시가장랑의 흔적인 듯 동행랑·서행랑이라고 불러온다.
어려서는 제법 총기가 있다고 하여 탁자 위에 올려세우고 "사람은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크다는 것은 전주와 같이 키가 크다는 말이 아닙니다"라고 말을 가르쳐 몇 번이고 되풀이 시키던 기억이 난다.
<『韓國史市民講座(한국사시민강좌)』13집, 1993, 일조각, p.135>


그런데 수묵의 회고에 의하면 인생에서 몇 번의 갈림길을 만났는데, 그 첫 번째 갈림길은 중학 진학이었다고 한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가고 싶은 사람은 선택의 길이 두 가지 있었으니, 하나는 서울로 유학하는 길이고 하나는 개성에 있는 두 중학교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길이었다.
1930년 당시 개성에는 중학교가 둘 있었으니, 하나는 사학의 명문인 송도고등보통학교(휴전 후 인천에서 개교)와 관립인 개성공립상업학교였다.
송도고는 조선인을 위하여 설립되어 쟁쟁한 교사들이 있었고(광복 후에 대학교 교수가 된 분이 많았다), 상업학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공학하는 학교일 뿐 아니라 교사들도 조선인은 붓글씨와 주산을 가르치던 단 한 사람뿐이었다.
따라서 이 두 학교의 성격과 체질이 상반되어 학생들의 기질, 졸업생의 동향이 전혀 달랐다.
이 두 중학교를 놓고 개성 사람들은 상업학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으니, 상업을 가르치는 학교라는 점과 졸업후에 취직하는데 유리하다는 판단이 작용하였던 것이다.
나의 진로는 상업학교로 정해졌다.
서울로 유학 가는 졸업생이 몇 사람 있었고 나의 성적이 서울의 중학교 시험에 합격하기에는 충분하였으나 또 한 번 작용한 것이 '저 어린 것을'이라는 모성애였다.
<같은 글, p.136>


   
▲ 개성 만월대에서. 왼쪽부터 전재규, 고유섭, 진홍섭, 박민종(1930~1940년대).

수묵은 5년간의 중학교 시절은 그의 표현에 의하면 "그야말로 무위도식의 세월이었다. 안정된 생활에 안주하는 지주계급의 생활에 젖어서 견문을 넓히거나 자극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는 좁은 세계 속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그 이유가 '상업학교'에서의 과정이 자기 적성에 맞지 않았던 것에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으나, 그렇다고 깨닫고 자기의 갈 길을 찾을 용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고 진술하고 있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유학간 친구 황수영·박민종과는 "봉투에 3전짜리 우표를 붙일 자리가 모자라도록 두꺼운 편지를 주고 받기도 하고 방학이면 어울려 다니곤 하였다"고 한다.

특히 박민종(서울대 음대 교수로 정년)은 바이올린 공부에 열중하여 동아일보 주최 콩쿨대회에서 수석을 차지하는 수재여서 그의 영향을 받아 클래식 음악의 레코드를 사서 당시로는 사치품에 속했던 '전기 축음기'로 듣기도 하고 급기야는 기타를 배우고 방학 때면 박민종과 집안에서 합주·독주 등의 작은 음악회를 열기도 하였다고 한다.

수묵은 "이러한 일들이 정상적인 학업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고 오히려 방해의 원인 되어 지금 돌이켜 보면 완전히 나태와 방황의 세월이었음에 틀림없었다"고 적고 있지만 이러한 그의 정서함양이나 예술적 기질은 나중에 미술사를 연구하면서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수묵의 인생에서 두 번째 갈림길은 일본유학이었다.

"이때 서울로 유학갔던 황수영·박민종은 일본으로 유학 가기로 결심을 하고 있던 터라 이번에는 나도 이 대열에서 떨어질 수 없다는 심정이 간절하였다. 이 의사를 비쳤더니 세 번째로 '저 어린 것을'의 심정으로 거절당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결단을 내려 일본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대학 재학 중에 아버지가 별세하게 되어 또 한 번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되었다.

즉 학업을 계속하여 끝을 맺느냐 아니면 포기하고 재산관리를 하느냐는 갈림길이었다.

이때 현명한 결단을 내려준 이는 어머니였다.

수묵은 일본 유학 생활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러나 눈앞에는 갑자기 넓은 시야가 전개되었으니, 그들 본토의 문화는 식민지였던 한반도와는 전혀 달랐고 그들이 조선인 학생을 보는 시각은 고향에서의 감시의 눈과는 전혀 다른 반외국인을 보는 것 같았다.
비로소 나와 고향, 나아가서는 '우리'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느낌이었다.
중학교까지의 교육에서 '우리'의 역사에 접하지 못했던 과거에 생각이 미쳤을 때, 정의가 무엇이며, 사회가 무엇이며, 문화가 무엇인가에 대한 차원이 다른 방황이 시작되었다. 사회학·사회정책 같은 책을 탐독하던 까닭도 그 때문이었던 듯하다.
이와 같이 일본 유학은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해 주었고 새로운 인식을 심어 주었다.
일본인들에게 지지 않으려는 소박한 생각과 함께 우리 것이 무엇인가를 찾고자 하였다.
방학 때 고향에 돌아오면 가까이 곳에 있는 유적으로 소풍을 다니기도 하고 박물관을 찾기도 하였다.
<같은 글, p.138>

   
▲ (위 사진) 개성분관은 광복 이후 6·25전쟁 전까지 고려청자의 보금자리였다. 1947년 국립박물관 개성분관이 되기 전 개성부립박물관의 전경.(아래) 1952년 국립박물관의 부산 피란 시절 회의 모습. 왼쪽이 진홍섭. 왼쪽에서 세 번째가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네 번째가 고고미술가 임천, 가운데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인물이 김재원 초대 국립박물관장,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고고학자 김원룡(1922~1993).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 우현과 만남 … 미술사 연구 필요성 느껴

수묵은 그 무렵 그의 인생의 영원한 스승이 되는 우현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개성부립박물관장이던 우현 고유섭 선생을 뵙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방학 때면 고향에 돌아와 황수영·장형식과 함께 자주 박물관에 놀러가곤 하였다.
우현선생에게서 강의를 들은 바는 없으나 같이 유적을 답사하면서 또는 박물관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받은 감명은 매우 컸다.
미술사라는 학문이 어떤 것인지 미처 알기도 전이고 그저 옛것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던 때였던 만큼 선생의 언행에는 모두 깊은 뜻이 있었으련만 그때는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나의 관심이 그쪽으로 기울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아주 그쪽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비로소 어렴풋이나마 학문이란 어떤 것이며 미술사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러면서부터 선생의 언행에서 큰 감명을 느끼게 되었다.
… 언제가 들려주시던 선생의 雅號(아호)인 汲月堂(급월당)의 汲月의 뜻과 아울러 학문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원숭이가 못 가운데 비친 달을 길으려 밤새고 물을 떠올렸으나 날이 새어도 달은 여전히 못 속에 있더라는 급월우화는 이태백의 '捉月(착월)'과는 다른 학문의 심원함을 암시하는 내용이고, 이것을 아호로 삼은 선생의 학문에 대한 외경과 아울러 정진의 심정을 깊이 삭일 수 있었다.
이렇게 받은 일련의 충격과 자극은 지금도 잊을 수 없으며 자신이 걸어온 연구의 자취를 돌아볼 때마다 더욱 새로워져서 필생의 교훈으로 남게 되었다.
<같은 글, p.139~140>

   
▲ 집고관 경주박물관(現 경주문화원)

 

▲'영원한 박물관인' 제1회 박물관인 상 수상

수묵은 영원한 박물관인이라 칭송되고 있다.

광복 후 개성박물관장을 시작으로 경주박물관장,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겸 박물관장을 역임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국박물관협회에서 이를 기려 제1회 박물관인 상을 수묵 선생에게 수여하였다.

개성박물관장 시절과 6·26동란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같이 있던 최순우는 서울로 떠나고 얼마 안 있어 동란이 터졌다.
6월25일 나는 서울에 있었는데 금족령 때문에 1개월 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내려가 보니 선생이 애써 장만하였던 지적도를 비롯한 각종 도면은 휴지쪽같이 산란되어 있었으나 진열실 안은 무사하였다.
높은 곳에 위치하였던 관계로 항상 미군항공기 감시비행의 공포 속에서 지냈고 급기야는 관사 근처 지하에 잔여 소장품을 매장하고 박물관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951년 1월 모든 것을 버리고 남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사건은 나의 인생에 또 한 번의 갈림길이 되었다.
영정포에서 강화로, 인천으로, 공주로, 목포로 몇 번이고 死線(사선)을 넘어 부산에 다다랐고, 몇 번이고 강화를 왕래하여 송악산을 바라보면서 실의를 달랬다.
유물상자로 칸막이를 한 부산 광복동 약창고의 사무실에 기거하면서 매일 같이 남포동 부둣가 곰장어 굽는 냄새를 맡으며 헤매던 처절하던 시절은 그저 악몽으로 돌리기는 너무도 처절한 하루하루였다.
<같은 책, p.142>


수묵은 경주박물관장 시절을 "경주에서의 생활은 큰 자극제가 되어 피상적인 흥미의 영역에 머물렀던 나의 미술사 연구에 확실한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그 동안 접한 그 많은 고대미술의 정수들은 나로 하여금 그 길로의 정진을 하게 한 귀중한 촉진제가 되었다"고 회고 한 바 있다.

 

1953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당시 경주박물관에서는 성덕대왕신종, 집고관과 정원의 석조유물 그리고 목조 진열실의 토기류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경주박물관의 상징인 신라금관은 미국으로 소개하여 금관실은 비어 있었다.
더러 관람객이 있기는 하였으나 금관이 없음을 알고 관람료를 돌려달라는 일까지 있었다.
궁여지책으로 금관총 출토 금관의 모조품을 만들어 허술한 진열장 때문에 진열하지 못했던 몇 개의 금귀고리를 금관고에 진열하였다.
그것으로 한 때의 박물관 체면을 유지하였으나 그로 해서 모조금관을 비롯한 금제품 도난사건이 일어나 박물관은 한 때 문을 닫았고 직원들은 오랫동안 고초를 받았다.
신라 때 금관의 성분은 지금의 것과 달라서 금관을 부셔서 다른 물건으로 만든다 해도 곧 알게 된다고 신문에 냈더니, 뒤에 안 일이지만 금관을 들고 기차를 기다리면서 경주역에서 신문을 보니 그러한 내용이 실려 있어 서천의 모래 속에 묻었던 것이 노출되어 도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부임하자마자 고초를 겪었다.
이러한 상황이라서 관람객의 수가 많은 것은 아니고 별로 바쁜 일도 없었다.
<같은 책 p.148>
 



그 무렵 수묵 선생에게 두 가지 중요한 일이 있었다.

하나는 1957년부터 2년에 걸쳐 있었던 우리 문화재의 미국순회전시에 그 관리자로 김원룡과 함께 1958년부터 1년간 미국에 체류하였던 일이며, 그 기간 동안에 미국내 주요 박물관을 1개월에 걸쳐 견학할 수 있었던 일이다.

이로 해서 유물의 보관전시는 물론, 유물을 통한 연구 등을 비롯한 방대한 수집품을 통해 세계의 고대미술에 대한 지식을 넓힐 수 있었다고 한다.

또 하나는 고고미술동인회(考古美術同人會)의 결성이었다.

1960년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과 함께 몇몇 동인(同人)이 발기하여 동인회를 결성하고 8월15일 광복일을 기하여 동인지 『考古美術(고고미술)』을 월간으로 창간하였다.

 

   
▲ 이화여대 박물관 전경

▲ "박물관 중심 20년 교수생활, 보람있는 시기"

1963년부터 1983년까지 이화여대 교수 겸 박물관장을 역임한 수묵은 "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20년간의 이대 교수생활은 나의 일생에서 인대깊었던 시기의 한 토막이었고 또한 보람있는 시기였다고 생각된다"고 회고 한 바 있다.


학생 때부터 官吏(관리)는 되지 말자고 서로 다짐하였고 개성과 경주의 박물관장 때도 학도로 자처했지 '관리'의 의식이 전혀 없었는데 이때의 문화재과장은 '문화재에 지식을 가진 행정관리' 행세를 해야 하는 자리였다.
매우 주저하였으나 주위에서 문화재 관리가 독자적으로 수행되는 출발점이니 그 기초를 닦아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권고를 따라 1년간령 기한부로 취임을 수락하였다.
먼저 이 부서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의 문화재에 관한 기록을 영구히 남길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개개의 문화재에 관한 사소한 변동이라도 일일이 기록하는 제도를 만들어 산일된 기록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불과 수개월 후에 5·16이 일어나고 국장에는 현역 대령이 취임하였으며 감사는 강화되었다.
관료기질이 몸에 선 나에게 군대식 근무는 감당하기 어려웠고 급기야 문화재과의 소관 사무였던 창경원 동물원의 1일 사료 비용이 얼마인가를 묻는 감찰원의 질문에 답변을 못한 탓으로 권고사직의 판정이 내렸다.
마침 이때 이화여대 박물관의 심형구 관장의 불의의 별세로 관장이 공석으로 있어서 김옥길 총장의 특별배려로 부교수로 채용되어 방황의 시간이 끝났다. <같은 책, p.146>

/이기선(미술사가) soljae@hanmail.net

인천일보·인천문화재단 공동기획
 
   
▲ 경주 남산 탑동 식혜골에서 출토된 남산신성비(제1비). 진홍섭 선생은 남산산성비의 수가 대략 200개 가까이 될 것이라는 견해를 발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