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18 『조선금석학 초고』 드넓은 학문세계, 금석학에 첫걸음 
   
▲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국보 제3호).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巡狩拓境碑)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碑)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해 세상에 알려졌으며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중요성 불구 방법론 부족

우현 불모학문 기초 마련

"문자의 기명이 있는 모든

물질 자료 고고학적 연구"


미완성 유고 '초고' 남겨

제자 황수영 업적 이어가

금석 연구 큰줄기 만들어



▲ 낯선 학문 '金石學'
우리나라 금석학의 현황에 대해 사학자 허흥식(許興植) 교수는 「韓國金石學의 現況과 課題」라는 글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우리나라 문화는 논리보다 몸짓이나 소리로 전승하였으나, 학문으로 정착되지 못한 분야가 많다. 금석학(金石學)도 이런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정도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저술이 부족하였다. 다만 최근에 이르러 중요한 금석문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이를 사료(史料)로 이용하기 위해서 깊이 있는 논문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모든 시대를 대상으로 전반적인 금석학의 단계로 진행되지 못한 부분이 많다.

금석학은 금석문(金石文)을 정리하고 이를 체계화하면서 의미를 찾아내어 기존의 다른 학문성과로 확대시켜 활용하는 학문이다. 이 분야는 우리에게 낯설고도 친근한 두 가지 얼굴을 나타내고 있다. 오늘날 고대사와 중세사는 금석학이나 금석문의 도움 없이는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에게 친근하지 않을 수 없는 대상이다. 그러나 아직껏 금석학을 제대로 강좌로 개설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시설이나 여건이 갖추어진 대학은 많지 않다. 단편적인 자료를 취급한 논문은 많으나 이를 체계적으로 종합한 변변한 개설서조차 거의 없을 정도로 낯선 분야이기도 하다. <許興植, 「韓國金石學의 現況과 課題」『韓國史學』16,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8.30. p.79~80.>

우현의 학문 세계를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분야가 금석학(金石學)이다. 금석학이란 분야는 일반인에게는 아직도 낯선 학문 분야이다. 금석학이란 어떠한 학문이며 그 의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직접 우현의 설명을 들어보자.

금석(金石)이라 함은 문자 그대로 단순히 금속(金屬)과 석류(石類)를 말함이 아니요, 『묵자(墨子)』에서와 같이 문자를 의미하는 죽백(竹帛)에 대하여 음악을 의미하는 송성(頌聲)도 아니요, 실로 곧 길금정석(吉金貞石)을 뜻함이니, 길금(吉金)이라 함은 종(鐘)·정(鼎)·준(尊)·대(敦)와 같이 길례(吉禮)에서 사용되는 금속기(金屬器)를 말함이요, 정석(貞石)이라 함은 비갈(碑碣) 등과 같이 후곤(後昆)에 영전(永傳)될 견석(堅石)을 말함이니, 이러한 양자(兩者)에 전각(鐫刻)된 문자를 곧 금석문이라 함이 그 원의(原意)이나, 후에 금(金)·목(木)·토(土)·갑(甲)·골(骨)·칠(漆) 등 각종의 물질적 자료에문자가 기입된 유물이 발견됨으로 말미암아 서적 이외에 물질적 자료에 전각기입(鐫刻記入)된 문자를 모두 금석문이라 하게 되었다.

따라서 금석학이란 것을 손쉽게 말하자면 이러한 금석문을 연구하는 학문이라 하겠으나,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연구하는가 즉 연구의 태도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것이니, 예컨대 은허(殷墟)에서 출토된다는 수골귀갑(獸骨龜甲)에 새겨진 고문(古文)으로부터, 삼대(三代) 선진(先秦)의 각기 유물에 새겨진 주문·대전(大篆)·소전(小篆)으로부터, 한(漢) 이후의 고례(古隷)·팔분(八分)·해(楷)·행(行)·초(草) 등의 문자의 변화, 서법(書法)의 연구를 할 제, 그는 곧 문자학(文字學)·서도학(書道學)의 한 부문이 될 것이요, 진(秦)·한대(漢代)의 고분으로부터 육조(六朝) 이후 수(隋)·당대(唐代)까지의 사륙변려체로의 변화에서 술사(述辭)·조사(措辭)의 변화를 연구하는 문학적 연구가 성립될 것이요, 진흥왕(眞興王)의 순수비(巡狩碑), 갈항사(葛項寺)·개심사(開心寺)·정도사(淨兜寺) 등의 석탑기명(石塔記銘)에서 이두(吏讀)를 연구하는 언어학적 연구가 성립되고, 기명(器皿)의 문자에서 그 시대·용도·제작형식의 변천 등을 탐구할 고고학적 미술사적 연구가 성립될 것이요, 문헌에서 찾을 수 없는 사실(史實)의 궐락(闕落)을 금석문에서 찾아내어 역사적 사실의 보궐(補闕)을 기도할 수 있는 사학적 연구도 성립될 수 있을 것이요, 기타 각종의 연구방법이 성립된다. 따라서 금석학의 응용 방면은 어떠한 일부 학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실로 연구방법의 여하에 있어 얼마든지 다방면에 이용될 수 있는 것이니, 금석학의 의의는 실로 중대한 것이다.

이와 같이 금석학의 이용 방면이 광무한 만치 그 정의(定義)를 내린다는 것은 도리어 이 학문의 가치를 국한하는 듯 싶으나, 억지로라도 정의를 짓자면 "금석학이란 것은 문자의 기명(記銘)이 있는 모든 물질적 자료를 고고학적으로 연구하여 모든 사적(史的) 연구에 대조(對照), 보충 시키는 것"이라고나 할 수 있을까 한다. 문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까닭에 순전한 고고학적 영역에 속하지 않고, 다만 고고학적 연구방법에 의하여 역사 그 자체뿐이 아니요 모든 문화 방면의 사적 고찰에 응용되는 까닭에, 금석학은 순전한 고고학(考古學)도 아니요, 실로 한 개의 중립된, 모든 방면에 이용을 바라고 있는 특수한 학문이다. 금석학은 문자 내지 문자 유사(類似)의 기호가 생기기 시작한 원시시대(原始時代)부터 문서기록이 희한한 시대까지 그 이용 범위가 있는 것이니, 특히 조선과 같이 고려까지의 문헌이 불과 십수 종에 국한 되어 있는 나라에서는 실로 금석학이 아니면 각 문화 방면의 연구란 기필(期畢)키 어려운 것이다. 금석학의 연구는 실로 조선에 있어서 더욱 중차대한 것이라 하겠다. <『우현 고유섭 전집』10, 「조선금석학 초고」, 열화당, 2013. p.25~27.>


 

   
▲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국보 제47호).통일신라 후기의 유명한 승려인 진감선사의 탑비이다. 진감선사(774∼850)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로,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쌍계사에서 입적했다. 진성여왕 원년(887)에 세워진 것으로, 진감선사가 도를 닦던 옥천사를'쌍계사'로 이름을 고친 후에 이 비를 세웠다 한다.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붓의 자연스런 흐름을 살려 표현한 글씨는 최치원의 명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할 만큼 뛰어나다.


▲ 미완의 유고 '초고'
우현의 금석학에 대한 자료는 미완성 유고가 남아 있다.

즉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친필 유고를 정리하여 1964년 고고미술동인회에서 등사본으로 발행한 고고미술자료 제10집으로 『조선미술사료』(高裕燮 遺著 其二)를 펴내면서 그 말미에 '부록'으로 「조선금석학」이란 이름으로 수록하였다. 미완의 유고임에도 학계에 공개한 연유에 대해서는 "당시 우현 선생의 금석학 연구는 완성된 연구는 아니나, 선생의 제논고(諸論考) 중에서 유일한 조선금석학 연구일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인 학자로서도 금석학 연구의 유일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으므로, 이 논고가 비록 미완이었어도 수록하였던 것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이 유고를 다시 '우현 고유섭 전집'(전10권)을 열화당에서 간행하면서 『조선금석학 초고』라는 이름으로 열 번째 권으로 묶어 2013년에 간행하였다.

책의 내용과 구성을 살펴보면 '서(序)'와 '금석학의 의의', '금석학의 역사', '금석학의 자료'로 이루어졌다. 세 번째 '금석학의 자료'는 금석학의 대상이 되는 분류항목으로도 볼 수 있는데 모두 열네 가지 항목으로 나누고 있다. 그 구체적 항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인(印)과 봉니(封泥), 2.와(瓦)와 전(塼), 3.화전(貨錢), 4.이기류 5.이기(利器), 6.칠기류(漆器類), 7.묘지(墓誌), 8.경감류(鏡鑑類), 9.석각류(石刻類), 10.탑지류(塔誌類), 11.탑비(塔碑), 12.사찰기적비(寺刹記蹟碑), 13.순수(巡狩)·척경(拓境)·강계비갈류(疆界碑碣類), 14.조상기류(造像記類)이다.



▲ 황수영 '스승의 유지' 받들다
우현이 금석학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 대해서는 「조선금석학」의 <서>에서 살필 수 있다.

필자 일찍이 금석문(金石文)에 대하여 유의(留意)한 바 없지 않았으나 적극적으로 전위(專爲)하여 연구하지 않았다가, 금번 이 강의록 발행에 제(際)하여 어떠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선학(先學) 대가(大家)가 계심에 불고(不顧)하고 비재(菲才)가 감히 담당케 된 것은 분을 넘어 모르는 경거(輕擧)의 소치(所致)였으나, 그러나 필자의 소기(所期)는 이 사학(斯學) 초입(初入)의 독자 제씨(諸氏)와 함께 연구하기 시작하고 배우기 시작하려는 단수한 욕망에서 이 대임(大任)을 수락하였을 뿐이요, 결코 독자 제씨께 감히 지도라든지 수교(授敎)의 의미를 갖고 집필함이 아님을 양찰(諒察)하기 바라는 바이다.더욱이 이 학문은 아직도 방법론이라든지 체계라든지 확립한 학문이라 볼 수 없어, 각기 연구자의 입지(立地)와 태도에 따라 관법(觀法)과 서술(敍述)이 닮아지는 모양이나, 그러나 초학자(初學者)에게는 어떠한 독립된, 편벽(偏僻)된 입지에서 내다보느니보다, 금석학(金石學)이란 어떠한 의미를 갖고 어떠한 역사를 갖고 어떠한 종류가 있는가를 우선 개념적으로 안 연후에, 각자의 입지와 욕구에 따라, 각자의 연구태도에 의한 방법론으로써 자료를 처리하기 바라는 것이다. <『우현 고유섭 전집』10, 「조선금석학 초고」, 열화당, 2013.>

우현이 옛 비석을 조사하고 탑영하던 일화를 그의 제자인 초우 황수영 박사는 「선사의 길을 따라서」라는 글에서 회고하면서 '나의 평생을 통하여 우리 금석문에 대한 집착은 선생으로부터 받은 것인 분명하다'고 밝히고 있다.

어느 해 여름인가 선생의 고비조사에 따라서 고려의 현화사비(玄化寺碑)와 영통사의 대각국사비(大覺國師碑), 그리고 귀로에 오룡사비(五龍寺碑)를 차례로 탁본하였다. 모두 사지(寺址)에 남은 고비(古碑)라 가까인 인가가 없었고, 탑본을 위하여서는 사다리를 빌어야만 하는데 가난한 농가에서는 마땅한 것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한편으로 먹을 갈아드려야 하였고 한손으론 낡은 사다리를 잡아야만 하였다. 더운 여름이라 물은 쉽게 말랐는데 그 짧은 시간에 선생의 익숙한 솜씨로 탁본이 진행될 때는 밑에서 쳐다 보면서 혼자 흥분하기도 하였다. 그 중 대각국사비의 두전(頭篆) 좌우에는 방구(方區)가 있어 그 안에 봉황무늬가 음각되어 있었다. 그것이 몹시 아름다웠기에 한 장 갖고 싶은 욕심이 간절하였으나 마침내 그 말씀을 드리기가 어려워 빈손으로 떠난 아쉬움은 그후 길이 남기도 하였다. 그러나 박물관에 돌아와 모두 표구되어서 진열실에 걸렸을 때는 마냥 즐겁고 자랑스럽기가 비할 수 없었다. 나의 평생을 통하여 우리 금석문(金石文)에 대한 집착은 선생으로부터 받은 것이 분명하다. <황수영, 「先師의 길을 따라서」『韓國史市民講座』제11집, 1992, p.165.>

미술사학자인 정영호 박사는 우현의 금석학 연구를 잇는 큰 줄기로 우현의 제자인 초우 황수영의 역할과 업적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손으로 금석문을 연구하는 학풍이 아직은 미연(未然)하므로, 초우선생께서는 은사의 뜻을 받들어 금석학 연구를 입지(立志)하여 꾸준한 자료수집과 조사 연구에 일념함으로써 금석문의 집성에 온 정열을 바칠 수 있었다. 마침내 『금석유문(金石遺文)』(고고미술자료 제2집, 고고미술동인회, 1963년, 100부 한정본 유인등사본)을 발행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는 오로지 은사로부터의 감화와 그 뜻을 받든 초우 선생의 혜성(慧性)과 열정에서 비롯된 결과라 하겠다. <『우현 고유섭 전집』10, 「조선금석학 초고」, 열화당, 2013. p.12~13

초우 황수영 박사가 엮은 『금석유문』은 그 뒤 1976년 4월에 일지사에서 『한국금석유문(韓國金石遺文)』이란 이름으로 단행본으로 출간되고 다시 1994년1월에는 5판 1쇄의 증보판이 발행되었다.

/이기선(미술사가) sol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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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일보, 인천문화재단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