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12. 고려청자, 흙으로 빚은'파란 꽃'
   
▲ 청자'순화4년명'항아리, 굽 안쪽 바닥에'순화사년계사 대묘제일실 향기장최길회조(淳化四年癸巳 太廟第一室 享器匠崔吉會造)'란 글씨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어<사진 1 참조>청자 제작연대를 밝히는 절대편년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음각 글씨는'태조를 비롯한 역대 고려임금을 제사지내는 태묘(太廟)의 제1실에 쓰이는 제사용 그릇으로 순화 4년, 즉 서기 993년에 장인 최길회가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우현, 생전 펴낸 유일한 단행본서 '고려청자' 다뤄

미학·미학사적 기준 한국인이 쓴 최초의 연구문헌

감상' 백미 … 문학·철학적 소양 바탕 禪사상 접목



『고려청자』는 우현 고유섭이 생전에 펴낸 유일한 단행본이다. 즉 1934년에 일본 호운샤(寶雲舍)에서 발행한『조선의 청자(朝鮮の靑瓷)』[도운분코(東雲文庫) 시리즈 제5권]가 그 원본이며, 우현의 제자이며 개성박물관장을 지낸 진홍섭(秦弘燮)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1954년에 『高麗靑瓷』란 이름으로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었다. 이어 1977년에는 전문용어 등을 일부 수정 보완하여 '삼성문고 제94호'로 개정판이 나왔다. 그리고 우현 선생 탄생 백주년을 맞아 열화당이 기획한 『우현 고유섭 전집』(전 10권) 가운데 제5권으로 2010년에 다시금 선보였다.


미술사학자 강경숙은 해제(解題)에서 그 제목을 「문사철(文史哲)로 풀어낸 청자의 역사와 미학」이라 붙이고는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칠십 년 전 일본 학자들의 연구를 섭렵하는 가운데, 한국 사람의 입장에서 문헌과 편년자료, 그리고 미학과 미술사관을 기준으로 청자의 역사를 실증적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기술하고자 노력한, 한국인에 의해서 씌어진 고려청자에 관한 최초의 문헌이라는 점에서 자못 그 의의가 크다"고 평하고 있다.

『고려청자』는 크게 여덟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청자란 무엇인가'란 항목으로 시작하여 청자의 발생, 명칭, 종류, 변천, 요지(窯址), 전세(傳世)와 출토, 그리고 감상에 이른다. 네 번째 항목인 '청자의 종류'에서는 다시 세부로 나누고 있으니, ①비색청자〔翡色靑瓷, 무상감청자(無象嵌靑瓷)〕 ②상감청자(象嵌靑瓷) ③백색퇴화문청자(白色堆花文靑瓷) ④화청자〔畵靑磁, 회고려(繪高麗)〕⑤진사청자〔辰砂靑瓷, 유리홍청자(釉裏紅靑瓷)〕⑥화금청자(畵金靑瓷) ⑦명관(銘款)이 있는 청자 ⑧잡유(雜釉) 혼합의 청자로 여덟 가지이다.

 

   
▲ 청자'순화4년명'항아리(국보 제237호,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입이 넓고 몸체가 긴 항아리이다. 유약은 녹갈색을 띠고 있어 초기청자냐 백자냐 또는 황유자라는 견해가 있었으나 대체로 초기 청자로 보고 있다.


▲ '청자란 무엇인가'
이렇듯『고려청자』는 "청자의 거의 모든 내용을 고루 기술한, 이른바 '고려청자사(高麗靑瓷史)'라 할 수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우현은 '청자란 무엇인가'에서 "청자란 무엇인가 하면, 한마디로 청색 자기(瓷器)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문자의 해석에 그치는 것으로 그 이름 속에 포함되어 있는 실태의 설명은 될 수 없다"고 말하며, 고려청자란 초벌구이한 그릇에 철분이 함유된 회유(灰釉)를 씌워 환원염(還元焰)으로 번조(燔造)해 생겨난 '청록색 자기'라 정의하고 있다.

청자라는 명칭에 관해서,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청자(靑磁)라고 쓰고 있지만 우현은 청자의 한자 표기를 문제 삼고 있다. 즉 '靑磁(청자)'로 해야 하는가, 아니면 '靑瓷(청자)'로 해야 하는가 하는, '磁'자와 '瓷'자의 고증문제이다. 『고려사(高麗史)』,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이규보(李奎報)의『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이제현(李齊賢)의 『익재집(益齋集)』 등 문헌에서 청자의 한자 표기를 하나하나 찾은 후, '瓷'로 쓰는 것이 가장 옛 맛이 난다고 결론짓고 있다. 우리나라 미술계에서는 최근에는 몇몇 학자만이 '靑瓷'라고 할 뿐 대부분은 '靑磁'로 표기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청자의 색을 '비색(秘色)' 과 '비색(翡色)'으로 표기한 것에 대한 의견이다. 서긍은 송나라 황제 휘종(徽宗, 1100~1125)의 명을 받아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 돌아가서는 1124년에『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을 저술하여 복명(復命)하였다. 비색(翡色)이란 말은 서긍이『고려도경』에서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한다(陶器色之靑者 麗人謂之翡色)"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고려비색(高麗秘色)은 「수중금(袖中錦)」[청나라 때 조용(曹溶)이 찬한 『학해유편(學海類編)』에 편집되어 있는 남송시대 태평노인(太平老人)의 글]에서, "국자감의 서책, 내온의 술, 단계의 벼루, 휘주의 먹, 낙양의 꽃, 건주의 차, 고려비색은 모두 천하에 제일가는 것이다(監書 內酒 端硯 徽墨 洛陽花 建州茶 高麗秘色 皆爲天下第一)"에서 비롯되었다. 태평노인과 같은 사람이 중국의 유명한 청자를 몰라서가 아니라, 중국청자에 비해 고려청자의 비색이 더 좋았기 때문에 송나라 청자를 제쳐 놓고 고려 비색을 천하제일로 기술한 것이다.

「청자의 발생」에서는 고려청자가 언제부터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문제를 두고 아직까지도 미술사학계에서도 확실한 결론을 내리고 있지 못하고 있다.

우현은 청자의 발생 시기에 대해서는 두 곳의 기록에 근거하여 11세기 문종대(文宗代, 1046~ 1083)로 판단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절대편년 자료인 '순화사년명(淳化四年銘) 항아리'에 대해서는 앞으로 논의해야 할 문제로 남기면서 자신의 생각을 유보했다.

순화(淳化, 990-994)는 송 태종(太宗, 976~997) 때의 연호(年號)이다. 순화 4년은 993년이므로, 이 항아리가 고려청자 발생 시기 설정에 중요한 편년자료가 된다.

우현은 "고려청자의 발생은 잡힐 듯하면서도 아직 잡히지 않는 매우 흥미있는 문제지만, 현상(現狀)으로서는 단정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해서 금후의 연구를 기다리는 바가 많다"라 결론짓고 있다. 참고로 1989년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 소재 벽돌가마터〔塼築窯〕 발굴 중에 순화삼년명 두형제기(豆形祭器)와 순화사년명 청자편이 여러 점 출토되었다.

이에 순화사년명 항아리(국보 제 237호, 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가 원산리 가마에서 제작되었고 초기 청자라는 것에는 요즈음 학자들은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청자의 발생이나 종류, 전세와 출토, 가마터 등 다루어야 할 사항이 많지만 지면 관계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이 문제에 대해서도 우현은 보다 실증적이고 정확한 연구를 하고자 애썼으며, 그 가운데는 다만 당시의 연구 여건상 자료 부족으로 오늘날 보면 수정할 사항도 있겠다는 점을 적어두고자 한다.

 

   
▲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국보 제68호, 간송미술관 소장) 고려 전반(12세기)에 제작된 이 매병은 몸 천제에 학과 구름무늬를 흑색과 백색상감으로 아로새겨 넣었다.


▲ 온몸으로 읽는 청자의 세계
「청자의 감상」은 이 책의 백미(白眉)이다. 우현의 문학적 소양을 바탕에다 두고 철학 및 동양 미학을 배경삼아 청자의 아름다움을 논한 항목이다.

우현은 우선 청자도, 일반 도자도, 다른 종류의 그릇들과 같이 일상 용구로서 발생하고 발달한 것이라 하였다. 당시 문인들의 시를 근거 삼아 '야채나 날고기를 담아서 쓰고 있던 것"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전남 강진(康津)의 가마에서 만든 청자가 제주도까지도 상품으로 팔리고 있음을 문헌을 통해 밝히고 있다. 고려인들이 청자를 귀하에 여긴 까닭은 물론 그 청색의 옥과 같은 아름다움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마도 부호들이나 즐기던 술병(豪家應是喜提壺) "이라든지 "푸른 자기 술잔을 빚어내 열 가운데 하나를 추렸다네(陶出綠瓷杯 揀選十取一)"이라든지 하는 것과 같이 정말 아름다운 청자는 열 가운데 한둘에 지나지 않고, 그 좋은 것은 특수계급에서만 사용되고 일반 평민 계급은 나쁜 것일지라도 만족하였던 것이니, 여기에 물건의 좋고 나쁜 것만으로는 시대를 판별할 수 없는 절반의 이유도 있는 것이다.

우현은 도자의 감상 태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 청자 참외모양 병(국보 제94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장릉(長陵, 고려 仁宗의 능)에서 인종의 시책(諡冊)과 함께 발견되었다. 유색은 비색(翡色)이 얇고 고르게 베풀어졌다. 꽃병으로 단정하고 세련된 형태의 작품이다. 고려청자 최성기인 1146년의 작품이다.


"무릇 도자의 발전이 실용에 근거를 두었다고 해도 그것이 감상의 대상이 되는 한 미술적, 예술적 뜻이 그 뒤에 배경으로 느껴져야 할 것이다. 실용적인 주의(主意)를 잊어버리기 쉽고 미술적, 예술적 뜻이 적극적으로 움직이려 하는 것은 서양식 감상법이고, 실용과 예술의사(藝術意思)가 혼연일체되어 있는 것은 동양의 독특한 감상법이다.

이 동양적 감상 태도를 더욱 굳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동양의 독특한 다도(茶道)에의 이해이고, 다도야말로 도자의 동양적 감상법의 유일한 길이라고 한다. 당나라의 시인 육우(陸羽)가 다도를 통하여 도자를 평정(評定)하고 있는 것은 유명하지만, 고려인도 다도를 통하여 도자를 애상(愛賞)하고 있었다."

이어서 도자는 다섯 감각 즉 오감으로 총괄적으로 감상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차(茶)의 미(美)는 색(色)ㆍ향(香)ㆍ미(味)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살리는 것은 도자기이다. 도자는 오감(五感)으로 총괄적으로 감상해야 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돌솥에서 끓는 소리에서 송뢰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더욱 감각의 경지를 초월하여 화적(和寂)의 경(境)에 들려 한다. '화적의 경'이란 즉 종교적 경지이고 다도는 선(禪)과 부합된다. 선은 다도에 의하여 볼 수 있고 닫는 선에 의하여 생각할 수 있다. 청자는 즉 선에 의하여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만약 현교(顯敎)를 도식적인 것, 객관적인 것, 외면적인 것, 간접적인 것이라 하면, 선은 직관적인 것, 주관적인 것, 내향적인 것, 구심적인 것이고, 이것을 상징색으로 말하면 전자는 백색ㆍ적색ㆍ황색 계통의 것이고, 후자는 흑색ㆍ청색ㆍ녹색 계통의 것이다. 더욱이 선교(禪敎)는 신라통일의 말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일반 민신(民信)에 침입하여 좋든 나쁘든 그들의 습성이 된 때는 고려라고 할 수 있다. 청자의 색은 즉 선의 색이다."

우현은 또 청자는 고려인들이 흙을 빚어 피워 낸 '파란 꽃'이라고도 상찬하고 있다.

"실로 그들 고려인의 상하(上下)를 일색으로 물들인 사상 감정은 바로 무상(無常)의 느낌이고 허무의 느낌이다. 유구한 대자연의 마음을 생각할 때 그것은 영원한 정적 그것이다. 차별세계의 시끄러운 들끓음은 대해(大海) 표면의 파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현세를 믿지 않고 유구한 정적을 동경한다. 청자는 그들의 '파란 꽃'이다. 그리고 이 선(禪)과 마음이 통하는 것은 또 선(仙)이기도 하다."

또한 청자의 색을 고려시대 풍수사상과 연관하여 고찰하기도 한다.

"더욱이 이는 잡신적인 짐작이지만, 회흑색(灰黑色)의 태토(胎土)로 살을 삼고 청색으로 옷을 삼아 표피를 쓰고 있는 청자의 색은, 그들의 풍수신앙에도 서로 관련하고 있는 듯도 생각된다. …줄임…충렬왕 원년 태사국(太史局)의 진언에 "동방(東方)은 목위(木位)에 속하고 색은 마땅히 청색이어야 할 터인데 지금 백의를 입는다. 백색은 금(金)에 해당하는 즉 서방의 색인데, 이것은 금이 목(木)을 제(制)하는 것이 되어 재미없으니 복색(服色)을 고치자"고 말해 복색(服色)ㆍ관개(冠蓋)ㆍ악조(樂調)ㆍ예기(禮器) 모두 흑색을 토대로 하고 청색을 표피로 할 것을 제창하고 있다. 이것은 즉 그대로 회흑색을 태토로 하고 청색을 표피로 한 고려청자의 색이고, 청자의 애호는 실로 이 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청은 실로 밝게 한 흑'이었다."

"고려도자의 힘은 버티고 있는 힘, 외부에 나타난 힘이 아니라, 거세된 힘, 내면의 힘이다. 내면적인 까닭에 따뜻하고 고요하다. 외견상 여러 가지 상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화려한 듯하지만, 그러나 화려한 그 속에는 여전히 따뜻하고 고요한 맛이 있다. 그것은 마치 현세를 믿지 않고, 현세를 믿지 않는 까닭에 현세에서 향락을 마음껏 누리자는 마음이다."

그리고 청자에 새겨진 무늬에 대해서도 동양적인 문학 정취를 맛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 고려인이 가장 좋아하고 따라서 많이 쓰이던 문양, 그래서 그 특색이 되어 있는 문양은 운학(雲鶴)이고 야국(野菊)이고 포류수금이 있는 연못의 경치이다. …야국의 무성함은 한국 산야의 한 특수한 경치이지만 …포류수금문의 경치는 그대로 당시의 정원예술이기도 했다"
 

   
▲ 청자 사자형뚜껑 향로(국보 제6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향을 피는데 사용하는 그릇인 향로인데 뚜껑의 손잡이 부분을 사자모양〔산예〕의 벌린 입으로 연기가 내뿜도록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직접 몸으로써 청자를 감상할 것을 권한다.

"예로부터 '도(陶)를 통하여 정(政)을 본다'란 말이 있다. 도자는 실로 한 나라의 역사를 대변하고 정신을 대변하고 습성을 대변한다. 이것을 감상하는 데는 풍부한 식견이 필요하고 아름다운 심리가 필요하다. 또 도자의 감상은 오감(五感)을 가지고 하라는 사람도 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코로 맡고, 입으로 맛보라고 한다. 이것은 즉 몸으로써 감상하라는 것이다. 몸으로써 한다는 것은 마음으로써 한다는 것이다. 몸이란 실로 마음인 까닭이다. 몸으로써 감상하고 몸으로써 맛볼 일이다. 즉 체험이지, 뉘라서 남의 말에 끌려 예술의 세계에서 놀 수 있을까보냐."

/이기선(미술사가) soljae@hanmail.net

인천일보, 인천문화재단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