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6. 예과, 고귀한 이상과 낭만을 즐기다 배움의 길 - 두번째
   
▲ 문우회 단체사진. 1928년 예과 3~4회 조선인 학생 90여명이 기념촬영을 했다.


총독부의 '내선일체론' 강조 불구

조선인 학생 - 日 학생 '물과 기름'

자유분방 풍조속 민족정신 찾으려

문우회 등 조직 … 정체성 지켜나가



▲칙령 19호 조선교육령 개정
일제는 1922년 2월, 칙령 19호로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을 개정했다. 이 개정령의 골자는 조선의 대학교육 및 예비교육제도를 규정하고 있다. 당시 일본의 학제는 심상(尋常) 소학교 6년, 중학교 5년, 고등학교 2년, 대학 3년으로 돼 있었다.

그런데 조선은 그들의 소학교에 해당하는 보통학교 4년, 중학교격인 고등보통학교 4년, 전문학교 2년으로 묶여 있어 중등교육을 마치기까지의 교육연한이 일본은 11년인데 비해 조선은 8년이어서 3년이나 차이가 났다. 따라서 조선 학생은 고보(高普)를 나와 법학전문학교(法專), 의학전문학교(醫專), 고등상업학교(高商), 고등공업학교(高工) 등 조선학교에 진학이 가능했다.

그러나 일본으로 유학을 갈 경우에는 수업연한 미달로 입학이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일본 유학생들은 중학교 3~4학년에 편입하거나 대학 예비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의 이같은 조치는 조선학생에게 실과 위주의 교육만 시키고 순수학문 연구는 억제하기 위함에서였다.

그러나 조선 땅에 대학을 세우고자 하니 자연 제도적인 모순을 시정하지 않을 수 없어 교육령을 개정, 대학 신설과 보통 교육의 수업연한을 연장하게 된 것이다. 개정교육령에 의해 보통학교는 4년에서 6년으로, 고등보통학교는 4년에서 5년으로, 각각 수업연한이 늘어났다. 비로소 조선의 고보(高普)가 일본의 중학교와 같은 동등 학력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총독부는 교육령의 개정을 두고 "민도가 그만큼 높아졌기 때문이다"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지(聖旨)로 차별을 철폐했다"는 등 구차한 변설을 늘어놨다.

 

   
▲ 1930년대 청량리역 주변 풍경.


▲경성제대 예과 첫 조선인 합격자 45명
일제는 1922 조선교육령을 개정하면서 1923년에 대학 문을 열 계획이었으나 예산을 마련 못해 그 다음해로 한 해를 미루게 되었다. 총독부는 1923년 11월에야 제국대학 창립위원회를 발족시켰다. 대학창립위원회를 구성한 총독부는 즉시 교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선 예과 건물부터 착수했다.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청량리(淸凉里)―지금의 청량리역 건너 미주아파트 일대―허허 벌판에 빨간 3층 벽돌건물이 지어졌다. 당시 서대문형무소 복역수들이 이 건물 공사장에 동원됐다는 기록도 있다. 드디어 교사가 완성돼 5월6일 낙성식을 가졌다.

이때 준공된 건물은 예과 본관 건물과 강당 및 도서실이었고 기숙사는 그해 9월에야 준공, 입사가 가능했다. 경성제국대학 총장은 2년 후인 학부개설과 동시에 부임했고, 그전까지는 예과 사무를 총독부 정무총감이 대행했다.

예정보다 늦어진 개교는 급피치로 진행되었다. 9일에는 신입생 선서식이, 다음 날인 10일에는 입학식이 있었고, 6월12일에는 성대한 개교식이 거행됐다. 개교식에 사이토(齊藤實) 총독은 나오지 않고 아리요시(有吉忠一, 경성제대 총장 사무취급) 정무총감을 비롯한 총독부 요인과 학부형들이 참석했다. 구한말 총리대신을 지낸 이완용(李完用)도 나왔다.

내빈들의 축사에 이어 수석합격자인 유진오(兪鎭午)가 학생을 대표하여 답사를 낭독했다. 개교식날 입학생에게는 기념메달과 축하떡(모찌)를 주었다. 기념메달은 겉면에는 3층의 예과 건물과 '개교기념(開校紀念)'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 '경성제국대학 예과(京城帝國大學豫科)ㆍ대정 13年'이라 써 있었다.

예과(豫科)의 조선인 첫 합격자는 45명이었으나 이과에서 1명이 등록을 하지 않아 44명만이 입학했다. 과별로 보면 문과의 경우 일본인은 152명이 지원, 61명이 합격했고, 조선인은 141명이 지원해서 29명이 합격했다. 이과는 일본인 지원자 254명 중 64명, 조선인은 100명 중 16명이 각각 합격했다. 전체 합격률은 일본인 30.7%에 비해 조선인은 18.6%에 불과했던 것이다.

예과 입학생의 첫 강의는 5월12일부터 시작됐다. 10일의 입학식에 이어 12일부터 정식 강의에 들어간 것이다. 학급은 문과 A·B 및 이과 A·B 등 4개 조로 나뉘었다.

문과 A는 법과 지망생, B는 문학 지망생으로 편성했으며 이과는 모두 의학 지망이었으나 인원이 많아 2개 조로 나누었다. 문과의 편성은 법학·문학으로 나눠 선발했기 때문에 지망별로 편성할 수 있었으나 이과의 경우는 달랐다. 80명을 2개 조로 나누어야 했던 까닭이다.

이과의 조편성은 입학시험 성적순으로 갈라 수석이 A조 1번, 2석이 B조 1번, 3석은 A조 2번, 4석은 B조 2번, 5석은 A조 3번식으로 편성했다. 좌석배열도 학번순으로, 뒷줄 오른쪽부터 차례로 앉혔다. 1번(組長)만은 맨 뒷줄의 가장 오른쪽 끝에 혼자 앉게 해 수업의 시작과 끝에 '기립', '경례'의 구령을 하도록 했다. 따라서 맨 앞줄이 가장 입시성적이 나쁜 학생들이었다.

 

   
▲ 1930년대 청량리역 주변 풍경.


▲예과의 교과과정
예과의 교과과정은 일본의 고등학교와 대체로 비슷했다. 그러나 외국어만은 예과쪽이 훨씬 비중이 컸다. 문과와 이과의 교과과정은 고등학교와 같이 서로 다른데 외국어는 문·이과 모두 교수시간이 많았다.

우선 문과의 경우 제2학년의 제1외국어(英語) 시간이 10시간으로 고교보다 많았고, 제2외국어(獨語)는 고교에서는 수의과(隨意科; 선택과목)로 취급했으나 예과에선 필수과(必須科)로 했다. 이과의 경우는 더욱 외국어에 중점을 두어 제1외국어(獨語)가 1·2학년 모두 10시간이었고, 제2외국어를 필수과로 해서 1학년은 영어를, 2학년은 라틴어를 필수하도록 했다.

또한 도화(圖畵;미술)를 1학년 필수과목으로 했으며 식물과 동물은 고교에서는 3학년에서야 처음으로 실험을 하는데 비해, 예과는 1학년부터 시작했다. 이과의 이같은 교과과정은 이과 학생이 의학부로 진학하는데 따른 배려에서였다. 도화를 필수로 한 것은 요즘 같이 X레이가 발달하지 않은 당시, 환자의 병세를 그림으로 세밀하게 표현하던 시대였던 까닭이다. 동ㆍ식물의 실험도 의학지망을 위한 대비였던 것이다.

교과과목은 이들 외국어 외에 국어(日本語)·수신(修身)·한문·심리·수학·체조 등이 문·이과 공통이고, 문과의 경우는 서양사·자연과학·철학개론·법제(法制)·경제 등이 추가된 반면, 이과는 동물·식물·화학 등이 더 있었다. 공통과목인 수학이라도 문과는 한 학기 정도 간단한 미적분(微積分)에서 끝난데 비해, 이과는 주 4시간씩 전 학년에 걸쳐 이수했다. 심리도 이과에서는 간단한 교양과목으로 그친데 반해, 문과는 심리·논리란 이름으로 시간 수가 많았다.

예과는 3학기제를 택했다. 1학기-4월1일~8월20일/2학기-8월21일~12월31일/3학기-다음해 1월1일~3월31일. 휴업(방학)도 세번 실시했다. 춘기휴업-3월16일~4월9일(25일)/하기휴업-7월11일~8월20일(41일)/동기휴업-12월25일~1월14일(21일).

그리고 참고삼아 수업료를 살펴보면, 개설 당시부터 1934년 3월 개정 전까지는 제1기(4월)와 제2기(9월)는 20원이고, 제3기(1월)는 10원이었다.

경성 장안에 따로 하숙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학교 근처는 저절로 하숙집이 늘게 마련이었다. 경성제대 예과 개설된 뒤 청량리 근처 여염집에서도 하숙 치는 집이 늘었다. 전차선이 닿는 창신동(昌信洞)도 하숙집으로 인기가 있었다. 하숙비는 독방이 한 달에 20원이고, 둘이 한 방에 들 경우에는 15~17원이면 되었다. 그런데 학교 기숙사인 진수료(進修寮)의 월비용은 22원으로 한 방에 6명이 들고 비싼 편이었다.

 

   
▲ 1930년대 서울. 멀리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인다.


▲따로 노는 조선과 일본 학생들
경성제대 예과를 개설할 때 조선총독부는 일본 학생과 조선 학생이 공학하는 최고학부라 해서 내선일체를 강조했다. 예과부장을 맡은 오다(小田省吾)는 또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간의 마찰을 우려학생들 앞에서 훈화를 할 때에도 그는 조선인, 일본인이라는 용어를 절대로 쓰지 않았다. 그는 조선인을 '국어를 상용(常用)하지 않는 사람', 일본인을 '국어를 상용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물 위에 기름 돌 듯이 일본 학생과 조선 학생은 따로 놀았다. 교실에서는 스팀이 2개 있었는데 겨울철 쉬는 시간에 스팀 한쪽에는 일본학생들만, 다른 쪽에는 조선학생들만 옹기종기 모였다. 어쩌다 조선학생의 한 학생이 일본 학생 쪽에서 놀 경우 문우회(文友會)에서 규탄이 일어났다.

예과 학생들의 과외 활동은 다양했다. 입학시험에 시달리고 난 끝이라 입한 한 뒤에는 마음것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는 자유분방한 풍조가 있었다. 독서에만 열중하는 사람, 음악, 운동. 그리고 놀러 다니는 일까지.
학생들이 부른 노래 가운데 가장 일반적이었던 것은 '데칸쇼' 노래였다.

"데칸쇼, 데칸쇼, 한 반년 지내보세. 그 다음 반년은 누워서 지내세!"란 내용이었다. <데칸쇼>란 데카르트, 칸트, 쇼팬하우의 첫 자를 딴 말이다. 대철학자를 운위하면서 뒹굴뒹굴 세월을 보낸들 어떠하리 하는 식의, 말하자면 대인기풍연(大人氣風然) 하는 노래였다. 개교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서였다. 겨울철이면 스케이트를 탔다.

특히 청량리 예과 주변의 너른 논은 북풍이 몰아치는 좋은 스케이트장이 되었다. 예과에는 16개 활동부가 있었다.

천렵을 잘 하기로는 문과 2회에서 제일 친한 '오명회(五明會)'란 모임이었다. 이강국(李康國), 한기준(韓基駿), 성낙서(成樂緖), 고유섭(高裕燮), 이병남(李炳南) 등 다섯이 민족정신을 찾고자 해서 1주일에 한 번씩 모여 토론을 했다.

하숙방에서 모일 때가 많았지만 여름철에 천렵을 가는 이유는 오순도순 모여 토론하기가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모여서는 곧잘 화투놀이도 벌였는데 주로 6백을 쳤다.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제갈량(諸葛亮)의 '칠종칠금(七縱七擒)'을 흉내 내 7번을 쳐서 7번을 이기자고 덤볐다.


▲조선인 학생회 문우회
예과의 교우회지 '청량'은 일본 학생들이 주로 글을 발표하고, 조선 학생들은 '문우'에 투고했다. 1924년 5월 경성제국대학 예과가 개설되면서 조직한 문우회(文友會)는 예과에 재학 중인 조선인 학생 전체를 망라한 조선인 학생회였다.

문우회의 목적은 조선 학생들간의 친목도모에 있었다. "군자는 글로써 벗을 모으고(以文會友), 벗으로써 인을 보충한다(以友輔仁)"는 '논어(論語)'의 글귀를 따서 지은 것이다.

회칙을 살펴보면, "본회는 조선문예의 연구와 장려를 목적으로 하고 본회의 목적을 달하기 위하여 매학기 1회씩 조선문예잡지를 발간한다"고 돼 있다. 그리고 회비의 금액과 납입기일도 회칙에 명시했다. 그러나 학교 당국의 해산 조치로 문우회의 활동은 만 4년으로 끝났다. 문우회가 해산당하고 나선 축구부를 중심으로 모였다. 축구부는 곧 문우회의 후신이나 다름없었다.

예과의 공식 교가는 3절까지 있었다. 학생들에게 공모하여 당선작을 뽑아 교수들이 다듬었다. 모두 3절이 있는데 1절만 소개 한다.

"푸른 하늘 저 멀리 학(鶴)이 춤추는 고려의 벌/밝은 빛은 널리 퍼져 서울의 동녘/천년(千年)의 노송(老松) 그늘에 모인 우리들/가슴 속에 불타는 진홍의 열혈(熱血)/넘치는 기개(氣槪)만이 고귀한 보배"

그런데 조선 학생들은 우리말 교가를 따로 만들어 부른 일이 있다고 한다. 우리말 교가의 작사자는 고정옥(高晶玉, 제6회 문B)이며 작곡자는 이화여전 음악교수 안기영(安箕永)이 작곡을 했다고 한다.

"먼동은 새 힘으로 닥쳐왔으니/우리의 할 일은 태산같도다/ 동무여 나오라 우리의 일터로/ 상아탑 기만을 발길로 차고…"

이상은 1절인데, 후렴과 2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아무도 기억하질 못한다.


/이기선(미술사가) soljae@hanmail.net


인천일보&인천문화재단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