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3. 애증이 엇갈리는 고향, 인천 - 우현의 삶, 두번째
   
▲ 1935년경 일본의 한 출판사가 발행한 화보집에 실린 문학산의 옛모습. 현재 연수구 청학동쪽의 고즈넉한 시골풍경과 함께 문학산의 능선이 실루엣처럼 눈에 들어온다. 우현은"미추홀의 고도를 찾아 영험한 샘물을 마시고 벌판을 거닐다가 복숭아로 여름을 작별하고 마니라"라고 일기에 적고 있다. /사진=인천일보 자료


27세까지 인천서 생활 … 경성제국대학 기차 통학

능허대·문학산 등 관련글 젊은시절 감성 묻어나

애정담긴 명문 여러편 썼지만 때론 냉소적 태도

침략에 나라 빼앗긴 식민지 지식인의 비애 엿봬


우현은 1905년에 2월에 경기도 인천군 다소면 선창리 용현(현 중구 용동)에서 태어나 1931년(27세) 5월에 경성 숭인동으로 이주함으로써 인천생활을 마감하였다. 그 사이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했고, 2년간 쉬다 16살 때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5년간 기차 통학을 하였다.

열여덟 살 때 인천 용동(현 중구 경동 애관극장 뒤 능인포교당 자리)에 큰집을 지어 이사했다. 이어 스물한 살 때 보성고보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경성 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하고 23세 때 동교 법문학부 철학과에 진학했는데 역시 기차 통학을 하였다. 그리고 25살 때 결혼하여 인천 내동에서 신방을 차렸다.

26살 때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4월에는 미학연구실 조수로 첫 출근하여 29살인 1933년 조수를 사임하고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취임하면서 개성으로 가족과 함께 이사했다.

 

   
▲ 우현이 18세때 아버지가 큰집을 지어 이사했다고 기록한 용동 옛집터에 지금은 한 사찰과 예식장 주차장, 모텔 등이 자리잡고 있다. /박영권기자 pyk@itimes.co.kr


이렇게 우현은 26년간 인천에서 나고 자라고 또한 결혼하여 신방을 인천에서 차렸다. 40년의 짧은 생애의 반 넘어 인천에서 보냈다.

외세에 의한 개항, 그리고 일제의 식민통치가 이어졌다. 경인철도가 놓이고 이제 경성의 관문으로서 인천은 급속한 도시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 모든 것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마음으로 느낀 고향 인천이다.

그러하니 아마 고향 인천에 대해 남다른 감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구체적인 내용을 살필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남이 있는 글 가운데 매우 단편적이지만 인천에 살면서 주변의 고적이나 명소를 찾아가곤 했던 자취를 엿볼 수는 있다.
우현이 24살 때인 1928년 9월1일자 일기를 보자.(연보에 의거하면 1928년에는 미학에서 미술사로 관심이 옮아가기 시작했던 때이다.)

"추풍이 건 듯 불기로 교외로 산책을 하였다. 능허대(凌虛臺) 가는 길에 도공(陶工)의 제작을 구경하고 다시 모래밭 위에 추광을 마시니 해향(海香)이 그윽히 가슴에 스며든다. 벙어리에게 길을 물어가며 문학산(文鶴山) 고개를 넘으니 원근이 눈앞에 전개되고 추기가 만야에 넘쳤다. 산악의 초토에도 추광이 명랑하다. 미추홀의 고도를 찾아 영천(靈泉)에 물 마시고 대야(大野)를 거닐다가 선도(仙桃)로 여름을 작별하고 마니라."

이 일기를 쓴 뒤 8년이 지난 1936년 8월호 <조광>이라는 잡지에 「애상의 청춘일기」란 제목으로 위에 적은 일기를 소개하면서 이어서 당시를 회상하는 글을 적고 있다.

"이곳에 '능허대'라는 것은 인천서 해안선을 끼고 남편으로 한 10리 떨어져 있는 조그만 모래섬이나 배를 타지 않고 해안선으로만 가게 된 풍치 있는 곳이다. 이 조그만 반도 같은 섬에는 풀도 나무도 바위도 멋있게 어울러져 있고 허리춤에는 흰 모래가 규모는 작으나 깨끗하게 깔려 있다. 이곳에서 내다보이는 바다는 항구에서 보이는 바다와 달라서 막힘이 없다. 발밑에서 출렁대는 물결은 신비와 숭엄과 침울을 가졌다. 편편이 쪼개지는 가을 햇볕은 나에게 항상 정신의 쇠락을 도움이 있었다. 이 '능허대'로 이르기 전에 산기슭 바닷가에 독 굽는 가마가 있었다. 물레를 발로 차고 진흙을 손으로빚어 키만한 독을 만들어 낸다. 엉성 드뭇하게 얽어 맞춘 움 속에서 만들어지는 질그릇에도 가을의 비애가 성겨 있었다. 이곳에서 문학산이란 고개를 넘기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으나 가을 풀이 길어 길이 매우 소삽하였던 모양이다. 이러한 곳에서 한참 헤매이다가 촌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기쁜 일이 또 어디 있으랴마는 희망을 품고 물어본 그가 벙어리일 줄이야 누가 염두에나 기대하였으랴? 우연치 않은 곳에서 인생의 적막과 신비를 느꼈던 모양이다. 가을의 비극, 인생의 애곡은 도처에 기대치 않은 곳에 흩어져 있다. 인천을 옛적엔 '미추홀'이라 하였고 비류(沸流)가 도읍하였던 곳이라하므로 이곳에 '미추홀'의 고도를 찾는다고 하였고 영천에 물 마셨다는 것은 해안에 있는 악물터의 약물을 두고 이름이요 선도로 여름을 작별하였다는 것은 그해 마지막의 수밀도(水蜜桃)나 사서 요기를 한 모양이다."
 

   
▲ 1930년대 일본인들이 제작 판매한 엽서사진 속의 능허대 모습. 지금은 매립으로 흔적을 찾을 수 없으나 우현은 1936년 잡지<조광>에 능허대와 주변 풍광을 자세히 묘사한 글을 기고했다.


24세의 청년시절, 감수성이 짙게 묻어나는 일기를 8년이 지난 시점에서 고향을 떠나 제2의 고향이라고 할 개성에서 젊은 날의 한 때를 회상하며 "지난날 내가 지금 같은 속한(俗漢)이 되기 전에는 밤잠이 늦었다. 대개 오전 한 두 시까지는 쓰거나 읽거나 자지를 않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또한 "그때는 비애를 느끼고 적막을 느끼고 번민을 스스로 사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즐거움은 번민하는 곳에 있다.―낙재고중(樂在苦中)이라는 철리(哲理)를 스스로 터득하고 기꺼워하던 때도 이러한 밤중의 사막에서다"고 토로하고 있다.

우현이 남긴 글 가운데 인천의 바다 풍경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역시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조광>(1938년 9월호)이란 잡지에 실린 글 「명산대천(名山大川)」중에 들어 있다. 마치 화가가 한 폭의 풍경화를 그리듯 또는 영화를 촬영하듯이 맛깔나게 인천의 풍광을 그려내고 있다.

발표한 연도로 미루어 보면 개성에서 지난 시절의 어느 때 보고 느꼈던 바를 회상하면서 쓴 것 같다. 1920년대 혹은 30년대 무렵의 인천 바다를 묘사한 글로 이만한 명문을 찾을 수 있을까. 조금 긴 듯하지만 옮겨보자.

"강화ㆍ교동ㆍ영종ㆍ덕적ㆍ팔미ㆍ송도ㆍ월미의 대소 원근의 도서(島嶼)가 중중첩첩이 둘리고 위워진 가까운 인천 바다를 들자. 아침마다 안개와 해미를 타고 스며 퍼져 떠나가는 기선의 경적 소리, 동으로 새벽 햇발은 산으로 밝아 오고, 산기슭 검푸른 물결 속으로 어둔 밤이 스며들면서 한둘 네다섯 안계(眼界)로 더 드는 배, 배, 배. 비가 오려나, 물기가 시커먼 허공에 그득히 품겨지고, 마음까지 우울해지려는 밤에 얕이 떠 노는 갈매기 소리, 소리. 또는 만창(滿漲; 가득하여 넘쳐 남)된 남벽(藍碧; 짙은 푸른빛)이 태양 광선을 모조리 비늘져 받고, 피어 뜬 구름이 창공에 멋대로 환상의 반육부각(半肉浮刻; 새김의 두께가 두리새김의 반쯤 됨)을 그릴 때 주황의 돛단배는 어디로 가려나. 먼 배는 잠을 자나 가도 오도 안 하고, 가까운 배는 삯 받은 역졸(驛卒)인가 왜 그리 서둘러 빨리 가노. 만국공원의 홍화녹림(紅花綠林;붉은 꽃과 푸른 숲)을 일부 데포르메(deformer;'변형하다'라는 프랑스어)하고, 영사관의 날리는 이국기(異國旗;다른 나라의 깃발)를 전경(前景)에 집어 넣으면 그대로 모네(C. Monet)가 된다."(괄호:필자註)

'명산대천'에 대한 글을 쓰면서 "산도 볼 탓이요, 물도 가릴 탓이라"며 드러난 산이 반드시 볼만한 것도 아니고 이름난 큰 내도 반드시 장한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에, 나무나 풀이 있는 산간의 창문을 통해 아침저녁으로 마주하는 이름 없는 둔덕도 정을 붙인다면 명산이 되고, 문 앞에 졸졸 흐르는 조그만 여울이라도 마음을 둔다면 큰 내 보다 못지 않다.
 

   
▲ 월미도 풍경을 담은 옛엽서. 한국전쟁 전까지 월미도엔 조탕이 있었으나 전쟁 뒤 전소됐다. 바다에서 본 조탕 본관이 우아한 전경을 하고 있다. 월미도 조탕은 고급 요정이었던 용궁각과 함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러니 굳이 그리는 산과 내를 딴 데서 찾을 것이랴.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 대한 애정이 없이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조선의 미술이 "누천년간 가난과 싸우고 온 끈기 있는 생활의 가장 충실한 표현이요, 창조요, 생산임을 깨닫고" 그 미술사의 완성을 소원한 것도 이미 젊은 시절의 이러한 고뇌와 번민을 거쳐 얻은 깨달음임을 엿볼 수 있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그런데 '향수(鄕愁) 설문'('조광'이 당대 재경인사를 대상으로 꾸민 지면)에 고향을 그리는 때는 어떤 때입니까라는 물음에 "없습니다. 오히려 지긋지긋할 뿐이외다"라는 우현의 대답은 조금은 뜻밖이고 놀랍다.

미술평론가 최열은 이 대목을 두고 <해제:심후한 문장, 황홀한 유혹>에서 "그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저와 같은 냉소법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우현 고유섭이라는 사람을 더욱 알고 싶어질 줄 누가 알겠는가"라고 적고 있다.

같은 설문 가운데 고향의 잊을 수 없는 풍경 한 가지를 묻자, "월미도(月尾島) 낙조(落照), 서공원(西公園) 신록(新綠)"을 말한다. 또 선생이 나신 집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에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도 자세히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또 다른 기회에 고향은 어디시며, 그 고향의 소화(笑話) 한 토막을 소개하십시오라는 부탁에 "인천이요. 특수한 소회는 모르겠소"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서공원은 본디 만국공원이었던 것을 일본이 강점기 동안 불렀던 명칭이고 오늘날 자유공원이다.

1930년 4월5일 자 일기에 "부부 동반하여 사진 촬영 후 만국공원을 일주하다"고 적고 있다.
옛말에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이 있다. 여우가 죽을 때 제가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뜻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이다.

고전에 해박한 우현이 이 말을 모를 리 없을 터인데, 왜 고향을 그리는 때가 없고, 오히려 지긋지긋할 뿐이외다 고 냉소적으로 말했을까.

우현이 스무 살의 젊은 감성으로 노래한 글 가운데 「해변에 살기」(<문우>창간호, 1925년)가 있다.

고인(古人)의 미추홀(彌鄒忽)은 해변이지요/그러나 성(城)터는 보지 못해요/넘집는 물결이 삼켜 있다가/빼앗고 물러갈 젠 백사(白砂)만 남아요//나의 옛집은 해변이지요/그러나 초석(礎石)조차 볼 수 없어요/사방으로 밀쳐 드난 물결이란/참으로 슬퍼요 해변에 살기

인천이 백제의 도읍지인 미추홀이나 그 자취는 찾기 어렵고, 내 옛집도 제물포 바닷가인데 초석조차 없다.
천몇백년이란 긴 시간을 건너 뛰어 겹치는 이미지는 성터도 집의 초석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제행무상이란 불교의 가르침이 있기는 하지만 왠지 그것들을 볼 수 없는 것은 무상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보고자 하여도 볼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다는 여운이 더 강하게 남는다.

왜냐하면 넘집고, 빼앗고 물러가는, 밀려드는 물결이 주는 이미지는 단순히 파도의 형상을 표현함을 넘어 한껏 감정을 격앙시키다가 '참으로 슬퍼요' 하면서 급전직하여 깊은 바다 속으로 빠져들 듯이 슬픔 속으로 침잠한다.

거센 물결이 열강들의 식민지 침략을 비유한다면, 해변은 변경에 놓인 약소국,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나라를 비유한 것이라는 이해도 가능하지 않을까.

나라 잃은 땅에서 식민지 지배를 받으며 살기란 참으로 슬플 것이다.

이런 시대 사항에다 전호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집안일 등 여러 가지 사연이 뒤엉켜 고향에 대한 우현의 마음은 사랑과 미움이 엇갈리는 복잡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니 애정이 큰 만큼 상처 받기 쉽고, 그리움과 애달픔은 미움을 낳은 것일까.


/이기선(미술사가) soljae@hanmail.net

인천일보.인천문화재단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