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현 고유섭은 1905년 행정지명으로는 경기도 인천군 다소면 선창리(船倉里) 용현(龍峴;현 인천광역시 중구 용동 117번지 동인천 길병원 터)에서 태어났다. 당시 용동은 내동, 율목동과 함께 한국인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사진은 우현이 태어났던 생가터의 현재 모습. /박영권기자 pyk@itmes.co.kr


어린시절 父 외도·母 출가 충격 … 병치레 잦아
스승 '취헌 김병훈' 가르침에 재능·품성 계발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인천만세시위' 가담
숙부, 인천 최초 한글 일간지 '대중일보'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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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것처럼 우현 고유섭 선생이 태어나 살다가 생을 마친 시기는 일제 강점기이다. 어두운 식민지 시대를 온 몸으로 겪으며 살다가 갔다. 시대가 주는 아픔, 그리고 근본적으로 식민지 백성이라는 데서 근원하는 것이기도 했으나 가정적인 아픔까지, 그리고 가장으로서 짊어져야 하는 경제적 책무, 거기다가 끊임없이 괴롭히는 질병. 이 모든 것은 선생이 꿈꾸고 선생이 이룩하고자 하는 세계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무겁게 하며 걸림돌이 되거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학문에 대한 열정, 민족 문화를 올바르게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에 대한 스스로의 다짐이 이 모든 어려움을극복하고 어둠의 시대를 살아가던 이들에게 등불이 됐다. 아무도 쉬이 가지 않는 길을 간 개척자.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영원한 사표(師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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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은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당시의 기록에 의거하면 우현이 태어난 집은 당시 행정지명으로는 경기도 인천군 다소면 선창리(船倉里) 용현(龍峴;현 인천광역시 중구 용동 117번지 동인천 길병원 터)이다. 1900년대 초의 용동은 내동, 율목동과 함께 한국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동네였다고 한다. 현재 이 일대는 급속한 도시화로 본래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다.


우현은 아버지 고주연(高珠演)과 어머니 평강(平康) 채씨(蔡氏) 사이에 일남일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후에 그에게는 서모 김아지가 낳은 원섭과 진섭 두 이복형제가 있다.


본관은 제주로, 중시조(中始祖) 성주공(星主公) 고말로(高末老)의 33세손이며, 조선 세종 때 이조판서·일본통신사·한성부윤·중국정조사 등을 지낸 영곡공(靈谷公) 고득종(高得宗)의 19세손이다(참조 [표-1]). 시호가 문충(文忠)인 영득공은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해 사후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고 한다. 저술이나 작품이 전하는 것은 없고,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홍화각기(弘化閣記)'와 몇 편의 시가 전한다. 우현의 문학적 자질을 굳이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뿌리에서 연유하는 것은 아닐까.


여기에 어린 시절 의성사숙(意誠私塾)에 다닐 때 가르침을 준 취헌(醉軒) 김병훈(金炳勳)의 감화도 더해져 그 재능은 물론 품성도 더욱 계발된 것으로 보인다. 취헌은 박학다재하고 강직청렴한 성품에 한문경전은 물론 시(詩)·서(書)·화(畵)·아악(雅樂) 등에 두루 능통한 스승이었다. 우현의 박식한 한문 교양, 단아한 문체와 서체의 기초는 바로 취헌에서 받은 영향이 컸다.


우현의 어릴 적 이름은 응산(應山)이다. 아호(雅號)는 우현(又玄)과 급월당(汲月堂)이라 했고 필명(筆名)도 있으니 채자운(蔡子雲), 고청(高靑)이 알려졌다. 우현이란 아호는 자호인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급월당은 스스로 지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급월당'이라는 호는 "원숭이가 물을 마시러 못가에 왔다가 못에 비친 달이 하도 탐스러워 손으로 떠내려 했으나, 달이 떠지지 않아 못의 물을 다 퍼내어(汲)도 달(月)은 못에 남아 있었다"는 고사(故事)에서 따온 것으로, 학문이란 못에 비친 달과 같아서 곧 떠질 듯하지만 막상 떠 보면 못의 물이 다해도 이루기 어렵다는, 학문에 대한 그의 겸손한 마음자세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현은 <도덕경(道德經)> 제1장의 "현지우현 중묘지문(玄之又玄 衆妙之文:현묘하고 또 현묘하니 모든 묘함의 문이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 창영초등학교(옛 인천공립보통학교)안에 있는 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16일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결의했다. 인천공립보통학교에 다녔던 우현은 들불처럼 타올랐던 만세 시위운동에 적극 가담했다./박영권기자 pyk@itmes.co.kr

우현 선생의 어릴 적 생활환경은 아버지의 사업으로 경제적으로는 비교적 여유로운 편이었다. 그런데 우현이 여덟 살 때 누이동생 정자가 태어났고, 이때부터 부친은 집을 나가 김아지란 여인과 살기 시작했다. 열 살이 되자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무렵 아버지의 외도로 어머니는 시집식구에 의해 친정으로 강제로 쫓겨나게 된다. 이때부터 주로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들의 관심과 배려 속에서 지내게 됐지만 이 일은 어린 우현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고 성격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아버지의 축첩이 단순한 바람기 때문인지 아니면 당시 유행하던 새로운 결혼관이나 연애관에 의한 것인지는 현재 자료로서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가정적으로는 매우 불행한 일이었음엔 틀림없고 특히 우현에게는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우현의 아버지 고주연(高珠演, 1882-1940)은 '관립외국어학교' 출신으로 1904년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돼 동경 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해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했다. 동경제대 철학과에 진학하려고 했으나 당시 조선 총독 데라우찌(寺內正毅)가 발표한 민족 차별적 교육정책에 분개해 진학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그는 민족의식을 지닌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식민교육정책으로 학문의 꿈이 좌절된 고주연은 귀국 후 '교관'직에 종사하다가 곧 그만두고 일본을 왕래하면서 당시 인천에서 성행하던 미두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인천의 전문적 문예운동단체인 '아우구락부'의 회원이었다. 지역유지, 상공인, 미두업자 등으로 구성된 이 단체는 정악(正樂)의 보급과 문화운동을 후원했는데, 고주연은 이 단체의 학습부장 역을 맡아 활동했다.
그런데 1926년 우현이 22살 때 아버지의 미두업이 실패하면서 아버지가 인천 집을 팔고 가족을 이끌고 강원도 평강군 남면 정연리로 이사를 간다.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인천에서 하숙하며 혼자 살게 된다. 그런데 우현의 일기에 의하면 "서모가 자식을 낳으면 자꾸 죽으니 땅이 있는 정연으로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 이 정연에 대하여는 '화강소요부(花江逍遙賦)'란 글을 써서 그 다음해 <문우(文友)>라는 경성제대 문학 서클인 문우회의 동인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 숙부인 고주철(高珠徹)은 인천의 저명한 외과 의사였다. 뿐만 아니라 해방 후 인천 최초의 한글 일간지인 <대중일보>를 창간해 지방 언론 발전에 기여했다. 따라서 아버지의 형제들도 당시 민족의식을 지닌 지식인이었다고 판단된다. 한마디로 우현의 집안은 민족의식을 지닌 개화된 집안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친어머니와 헤어져 서모와 이복형제들과 사는 가정생활을 "괴로운 나의 가정의 해결은 아편과 술 한 잔에 있다. 누더기 같이 매달리는 그들――삼촌·사촌·서자, 그들이 다 무엇이냐"고 남몰래 일기에 적고 있다. 또 1929년 10월28일 일기에 이렇게 간단히 적고 있다. "오늘이 결혼 날이다. 초야(初夜). 지금까지 고난을 고백하였다." 신부와 첫날밤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지금까지 겪은 고난을 '고백'했다니,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난이 얼마만큼 아팠으면 그 달콤해야 할 첫날밤에 자신의 마음을 열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니면 여러 사정으로 남모르게 감추었던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며, 이제 새로운 인생의 동반자가 된 아내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표현한 것일까.

열 살에 집에서 멀지 않은 인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이미 취헌으로부터 한학을 비롯한 배움의 기초가 이루어진 우현은 명석한 머리에 행동도 민첩하며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학년이 올라 갈수록 성적이 떨어져 졸업할 때는 중간을 밑도는 정도였다. 감수성이 예민한 우현에게는 사춘기도 빨리 왔는지 성격도 입학 당시에는 차분했으나 졸업할 무렵에는 반항적이라 기록돼 있다. 병력사항에는 편도선염이나 임파선종 등 병치레를 많이 한 것으로 보아 병약했던 것도 원인인 것 같다.
1918년 우현이 열네 살에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니 9회 졸업생이다. 그리고 1920년 열여섯 살에 경성에 있는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졸업 후 곧바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않아 2년간의 공백이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우현 선생이 태극기를 직접 그려서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고 초가집 지붕 위에 올라가 태극기를 꽂았습니다. 우리들은 모여서 만세를 부른 후 동네를 돌다가 체포되었지요. 7~8세의 어린 아이들은 훈방으로 금방 풀려났지만 우현 선생은 유치장에 있다가 사흘째 되던 날 큰아버지가 찾아가 겨우 나올 수 있었습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인천에서도 벌어졌다. 3월16일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 9일 만국공원 시위, 24일 부평시위, 27일부터 시작된 시내상가 철시 투쟁, 문학동 시위 등 8회에 걸쳐 연인원 9000여 명이 참가했다. 인천만세시위사건이다. 들판에 번지는 들불처럼 타올랐던 만세 시위운동에 소학교를 갓 졸업한 우현이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어린 나이지만 우현에게는 이미 뚜렷한 민족의식이 자라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기선(미술사가) solja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