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미의 탐구를 위해 떠나는 순례 - 연재를 시작하며
   
▲ 인천시립박물관 광장에 있는 돌비석에'우리의 미술은 민예적인 것이매 신앙과 생활과 미술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우현의 글이 새겨져 있다. /박영권기자 pyk@itimes.co.kr


고미술 재발견 통해

일제 강점기 민족의식 독려 
동서 아우른 학술적 깊이

극찬 불구 심층연구 미비

인천 - 개성 학문여정 탐구



우현 고유섭 선생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한 인천의 선각자다. 인천일보는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앞으로 20회에 걸쳐 우현의 삶을 재조명하기로 했다.

대표집필은 이기선 교수가 진행하며 이 기획을 통해 우현의 삶과 학문을 생생하고 밀도있게 조명할 예정이다. 인천문화재단은 우현상을 제정해 매년 학문적 업적이 있고, 예술적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시상하고 있다.


▲우리는 왜 우현을 말해야 하는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뚜렷하다. 어둡고 혼란스럽던 시절,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삶과 학문의 세계를 외롭지만 꿋꿋하게 가꾸며 살아갔던 한 인물이 발자취를 찾아 가고자 한다. 하늘이 그에게 허여한 이승에서의 삶은 불과 40년에 그쳤지만 그가 남긴 글은 수백 편에 이른다. 우현 생전에 만나 가르침을 받고 사후에는 스승을 길을 따라 한국미술사학의 발전에 노력한 수묵 진홍섭(1918-2010)은 이렇게 적고 있다.

선생은 40년이라는 짧은 생애에서 깊고 넓은 사고와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사람이 태어나서 철들어 사리를 분별하면서 살 수 있는 기간을 생각할 때 선생의 발자취는 경이적인 것이었다.

선생의 사상은 동서양의 철학을 섭렵한 결과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선생의 지식은 동서고금의 학문과 예술에서 배출된 것이며, 선생의 문장은 예민한 감수성과 문학적인 운취를 구사하였다.

결국 천재적인 재능으로 이루어진 깊은 학구적인 연찬과 예민한 감수성으로 민족의 생산품 속에 숨어 있는 미의 실체를 찾고, 그것을 선양 계몽하는 데 일생의 정력을 소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고유섭 지음 진홍섭 엮음, <구수한 큰 맛> 한국미술의 이해2, 다할 미디어, 2005. 머리말 중에서) 그러나 해방 이후 이어진 사회적 혼란과 이념의 갈등으로 빚어진 결과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현 고유섭이라는 이름은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져 가고 있어 뜻있는 이들이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인문학이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지도 못하고 서구의 이론을 섣부르게 도입하는 등 부유(浮游)하고 있는 데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를 '영웅 만들기'를 꾀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추구하고자 했던 것들, 그리고 그가 살며 겪은 괴로움, 아픔, 슬픔, 서러움, 기쁨 등을 추체험해보고자 한다. 이렇게 한 인간이 살며 가꾸어 온 삶과 배움을 통해 우리의 삶도 풍요하고 보람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인천시립박물관의 우현
서해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청량산 자락에 고인돌을 형상화한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1990년에 이 자리로 옮겨 온 인천시립박물관이다. 이 박물관 마당에 인물상이 하나 놓여 있다. 중년의 남자가 양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고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도자기를 어루만지며 시선을 도자기에 고정한 채 유의하여 살피는 모습이다.

청동쇳물을 부어 만든 이 조각상이 바로 '우현고유섭선생상'이다. 또한 야외전시장(우현마당)에 그의 '어록비(語錄碑)'가 서 있는데, 1974년 우현 삼십 주기를 기려, 인천 출신이자 초대 인천시립박물관 관장을 지낸 이경성 선생이 중심이 되어 건립한 것이다.

그리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면 '기증실'이 마련되어 있고, 그 한 곳에 우현의 유품과 중요 저작물이 전시되어 있다. <칼의 노래>를 쓴 작가 김훈은 그 책의 '책머리에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눈이 녹은 뒤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여러 번 갔었다. 거기에, 장군의 큰 칼이 걸려 있었다. 차가운 칼이었다. 혼자서 하루 종일 장군의 칼을 들여다보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영웅이 아닌 나는 쓸쓸해서 속으로 울었다. 이 가난한 글은 그 칼의 전언에 대한 응답이다."

우리는 인천시립박물관을 찾아 우현의 유품과 그의 저작물을 관람하며, 그리고 동상과 어록비를 보며 어떠한 감회를 가슴에 품을까.

아직도 우현의 평전을 갖지 못한 우리에게 멋진 선물을 선사할 누군가가 지금 우리 틈에 있기를 기다린다. 우리의 한국미 탐구를 위한 순례의 발길은 우현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인천에서 시작하였다.

 

   
▲ 대왕암 원경.


▲우현의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이번에는 저 멀리 동해로 가 보자.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를 지나 지금 행정지명으로는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 바다 '경주 문무왕릉(사적 제158호, 속칭 대왕암)'은 우현이 찾아갔던 곳이다. 아마도 석굴암과 불국사를 순례한 후에 감은사를 거쳐 이곳까지 걸음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현은 그 때의 기행을 후일 개성에서 발간되는 <고려시보>에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란 제목으로 발표한다. 그 내용을 일부를 옮겨본다.

"이곳은 경주 석굴암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물이 다른 세류와 합쳐서 대종천(大鍾川)을 이루어 가지고 동해로 들어가는 곳이니 대종천이 바로 흘러들어가는 그 어구에 용당산 대본리라는 곳이 있고 그 포구 밖에는 오직 한 그루의 암산인 대왕암(大王岩)이란 돌섬이 있을 뿐이다. …이미 세상의 이목이 떠나 있는 세계, 화두(話頭)에서 잊어버려지고 있는 세계, 그러나 이곳에는 무한한 이야기 거리가 숨겨져 있는 세계, 한 많은 세계, 꿈 많은 세계이다." (<고려시보>, 1939.8.1.)
 

   
▲ 경주 감포에 세워진 우현 기념비.


"경주에 가거든 문무대왕의 위적(偉蹟)을 찾으라. 구경거리의 경주로 쏘다니지 말고 문무대왕의 정신을 기려 보아라. 태종무열왕의 위업과 김유신의 훈공이 크지 아니함이 아니나 이것은 문헌에서도 우리가 가릴 수 있지만 문무대왕의 위대한 정신이야말로 경주의 유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니 경주에 가거들랑 모름지기 이 문무대왕의 유적을 찾으라." (경주기행의 일절, Ⅳ, '경주에 가거든',<고려시보>, 1940년 7월16일, 8월1일)

두 글을 발표한 시기를 보면 1939년과 1940년으로 한 해의 차이가 있지만,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한 해 전이다.

다시 말해 조선총독부가 황국신민화 운동을 강제로 시행하던 때이다. 이를 상기하다면 우현 선생이 이 글을 쓴 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바닷가 한 켠에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 새겨진 기념비가 있다. 이 기념비는 우현 삼십 주기를 맞은 1974년에 한국미술사학회에서 세운 것이다. 그 터는 바로 우현 선생이 직접 대왕암을 바라보면 휴식을 취했던 곳이기 때문에 선택한 장소이다.

또 그 자리에 '경주기행의 일절' 말미에 노래한 문무대왕을 기리는 시 전문을 돌에 새겨 세웠고, 다시 <삼국사기> '문무대왕'조에 실린 유조(遺詔) 전문을 역시 돌에 새겨 세워다. 후학들이 우현과 함께 문무대왕을 기리는 성지로 가꾸고자 하였다.

그런데 역사의 자취가 깊이 서린 이 바닷가는 이제 관광객의 발길이 많아지면서 횟집이 늘어서는 등 세속의 티끌로 뒤덮이고 말았다.

 

   
▲ 우현 기념비에는'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고 쓰여 있다.


▲개성부립박물관 관장 시절
1933년 4월1일, 29살의 젊은 나이에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취임했다. 해방을 한 해 앞둔 1944년 6월26일 간경화로 별세했다.

묘지는 개성부 청교면 수철동에 있다. 11년이 넘게 박물관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고려의 유적을 찾아다니며 그의 학문 세계를 넓혔던 개성은 우현에게는 제2의 고향, 아니 그 이상을 넘어서서 어쩌면 정신적 고향으로 삼았던 것은 아닐까.

이와 같이 뜻 깊은 개성을 지금 우리는 직접 찾아 갈 수 없어 안타깝다. 우현의 길을 따라 개성은 물론이고 금강산으로, 평양으로 그리고 압록강 넘어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옛 땅을 노닐 수 있는 날은 언제쯤 가능할까.

 

   
▲ 개항기 인천 각국 조계지역에 있던 조계석.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우현의 삶과 학문, 연구 더 깊어져야
우현을 기억하고 또 그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노력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의 학문적 성과에 대한 평가는 선구적 의미를 강조하는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인연과 공덕으로 마침내 열화당이 '우현 고유섭 전집' 열 권을 완간하여 '우현학을 위한 주춧돌'을 놓았고, 앞으로 이를 보완하는 작업은 물론 '우현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한 우현 아카이브 작업도 벌여 나갈 것이라 한다.

이와 더불어 인천 경기지역 대표신문인 <인천일보>도 이 같은 일에 동참하고 선양하기 위한 사업을 기획하여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서해안시대를 맞아 인천과 우리 대한민국은 새로이 비약을 꿈꾼다. 이제는 바닷길만이 아니라 하늘길도 활짝 열렸다.

무역을 통한 경제성장도 지속해야 하겠지만 진정한 목표는 지구촌 모두가 평화공존하면서 사람다운 삶을 가꾸는 일이다. 그 일은 시대의 어둠을 밝히면 외로운 길이지만 홀로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나간 사람들의 공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현 고유섭 선생이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다.


/이기선(미술사가)

인천일보&인천문화재단 공동기획



▲우현 특별기획은
'우현 고유섭 그 삶과 학문세계'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20회 연재된다. 하나는 우현의 개인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제 강점기의 여러 모습을 살펴볼 예정이다.

아울러 우현이 교유한 지기나 그를 따랐던 제자를 통해 그의 인간상을 엿보고자 한다. 다른 하나는 우현이 추구한 학문 세계로 그가 성취한 학문적 성과나 중요 저술 내용을 풀어서 독자들에게 소개할 예정이다.


▲저자 이기선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나라 안팎의 문화유산을 답사하고 박물관 및 학교에서 연구과 강의 그리고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우현의 제자인 황수영 선생을 스승으로 모신 필자는 <초우황수영전집>, <고유섭전집>(전4권, 통문관, 1993)과 <우현 고유섭 전집>(전10권, 열화당, 2007-2013)의 간행에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