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냥 거리상으로 멀고 먼 남미에 탱고라는 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아니다. 어디에선가 주워들은 건 있지요. 아르헨티나? 65년 우리나라 이민, 최초 냉동선의 발명, 마라도나, 가우초, 메르세데스 소사, 에비타, 에바 페론, 삐아졸라, 포클랜드 전쟁, 뭐 그러고 보니 잘난 척 좀 하는데…. 하하하아니, 브라질의 쌈바도 알고 있었죠, 그거나 저거나 홀라당 발라당 벗어버리거나 쭉 타진 치마를 입고 남녀가 서로 은밀한 부분들을 스치면서 자극하는 뇌쇄적인 춤일 거라는 상상으로 뭐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사람 사는 게….좀 더 알게 된 건 땅고에 쓰이는 전문용어들로 스페인 말 몇 마디 정도…! 춤 추는데 철학 서적 페이지 넘기며 추는 건 아니겠지요. 사람 사는 것 어디서나 마찬가지라고 또 생각했습니다.그래 예술입니다. 요즘 말이면 다 되는데 예술 이라잖습니까? 난 잘모릅니다. 이번에도 모든 것을 글로 배웠습니다.2011 김충순. 켄트지 210×290㎜, 연필, 수채.

인터넷을 뒤져서 탱고 강습학원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나는 남산공원 야외무대 앞에 세워져 있던 홍보거치대에 적힌 인터넷 주소로 그날 보았던 탱고동호회를 찾을 수 있었고, 강습 시간에 맞춰 그곳을 찾아갔다.

충무로의 한 빌딩에서 지하 스튜디오로 내려가는 엘레베이터를 탔을 때 나는 오랫만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경험했다. 항상 낯선 세계를 만나는 것은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무엇인가 내 인생이 변화될 것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자 남녀의 다리가 뒤엉킨 포즈의 커다란 그림이 보였다. 스튜디오 입구에는 탱고 동작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앞에 섰다. 안에서 탱고 음악이 조그맣게 흘러나왔다. 문을 열자 많은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있었고 그 안에서 두 명의 남녀 선생이 탱고수업을 하고 있었다.

"처음 오셨어요?"

여자 선생이 나를 보고 물었다.

그때부터 나는 탱고를 배우기 시작했다. 내 주변에서는 내가 탱고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나는 직장과 또다른 일 사이에서 탱고를 배우기 시작했다.

되돌아보면 그것은 참으로 긴 인내의 시간이었다. 탱고를 배우는 시간이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내 몸은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서툴고 딱딱했으며 무뎠다.

하지만 한 달 두달이 지나자 조금씩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나는 지하주차장 한쪽 구석에서 탱고의 기초 스텝인 8살리다를 밟아보기도 했고, 공원을 산책하다가 오쵸와 볼레오를 해보기도 했다. 내 몸도 조금씩 변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젊은 시절 탄탄했던 몸과는 달리 배가 나오기 시작했던 몸은 날씬하고 탄탄하게 바뀌어져 갔다.

내 주변 사람들은 그 누구도 내가 탱고를 추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것은 나만의 은밀한 사생활이었다. 꼭 숨길 것은 없었지만 굳이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탱고는 삶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과 아브라소를 하며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남자의 상체에서 시작된 에너지가 여자의 상체로 건너가 여자를 움직이는 탱고의 기본 에너지 이동은, 내가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아직 내가 이 세계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었다.

탱고 스튜디오는 나의 또다른 세계였다. 탱고 선생은 무뚝뚝하고 말이 없었지만, 같이 탱고를 배우는 사람들 중에는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들과 자주 어울려 뒷풀이를 갔고 보통 뒷풀이 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지기 일쑤여서 다음날 출근할 때 어려움도 많았지만 탱고는 분명히 나를 변화시켜 놓았다.

나는 술을 먹을 수가 없었다. 의사는 내 간경화가 6개월을 넘기려면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몸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꾸준히 운동할 것을 권유했다. 배에 차오르던 복수는 탱고를 추면서 저절로 빠졌다.

6개월 시한부 선고를 이겨내기 위해 탱고를 배운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나는 생각한다. 나를 살리기 위해 탱고가 내게로 왔다고. 즉, 나의 탱고는 삶의 탱고였다. 나는 죽어가고 있었지만, 탱고는 나를 살려놓았다.
나는 절실한 마음으로 탱고를 추었다. 내가 탱고를 추는 그 순간, 나는 살아있었다. 직장에서 사무적으로 일을 하는동안 나는 죽어 있었다.

예전에는 일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새벽 6시부터 회사에 나와 일한 적도 있었다. 그때 사람들은 나를 보고 미쳤다고 했지만 나는 정말 일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런데 탱고를 배운 후부터는 탱고를 출때만, 나는 살아 있었다.

나는 회사 일과는 별도로 죽음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상담을 해주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내 의지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삶의 한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한 사람들이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도중에 그들은 절실하게 도움을 필요로 했다. 나는 그들을 위해 상담을 해주었다. 물론 약간의 상담비용도 받았다. 하지만 돈을 위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무보수로 일하면 그들 역시 나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일도 탱고를 만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한 번은 어떤 50대의 신사가 상담을 해온 적이 있다. 나는 그 신사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 그는 오래전 성수대교 사고로 자식을 잃은 사람이었다. 학교에 가기 위해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그날까지 내야할 특별활동비를 달라고 했지만, 그 신사는 줄 수가 없었다. 일용직 노동자로 살고 있던 그는 그때 허리를 다쳐 일을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아끼던 딸이었는데, 그 딸이 다른 친구들보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침에 그렇게 울면서 나간 딸이 성수대교 붕괴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삶을 포기하려고 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딸의 사망은 그의 인생을 변화시켰다. 사망위로금으로 그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풍족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는 늘 괴로웠다. 딸의 목숨과 바꾼 돈으로 소주를 마시고, 노래방에 갔다. 도우미로 나오는 여자들과 2차를 가기도 했다. 그는 정말 죽고 싶었다. 그 짧은 순간의 쾌락을 그에게 주기 위해, 딸이 일부러 죽은 것은 아닌가 자책이 들기도 했다.

그 남자는 딸의 죽음으로 받은 보상금을 모두 탕진하고 다시 일용직 노동자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밤마다 딸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자신은 죽고 싶고, 죽는다면 딸이 죽었던 그 자리에 가서 죽어야겠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죽음을 결심하자 그것을 실천할 용기가 없었다. 스스로 몇 번이나 성수대교를 걸어가봤지만, 뛰어내리는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딸이 죽은 그것에서 자신도 생을 마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와 함께 성수대교로 갔다. 성수대교 남단에서 만나 천천히 다리를 걸어갔다. 그리고 수심이 가장 깊은 다리의 중간까지 걸어왔을 때, 나는 가장 좋은 지점을 알려주었다. 그는 자신의 흔적을 세상에 남기고 싶지 않아 했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권한 것은 등산용 자켓을 입고 오라는 것이었다. 또 바퀴달린 여행용 가방 안에 무거운 쇠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는 철공소 등에서 버린 쇠뭉치 작은 것들을 모아서 여행용 가방에 넣어가지고 왔다. 택시를 타고 다리 중간에서 내리면 곧바로 자살자로 의심해서 신고가 들어간다. 우리는 다리 밑에서 만나 함께 걸어갔다.

다리 중간에서 나는 그에게 뛰어내리기 가장 좋은 지점을 알려주면서, 이제 내 마지막 부탁도 하나 들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핸드폰을 꺼내 MP3로 녹음된 탱고 음악을 틀었다.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를 안았다. 나의 가슴과 그의 가슴이 부딪쳤다.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를 안고 음악에 맞춰 서툴게 탱고 스텝을 밟아보았다. 탱고 음악은 슬펐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살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치게 만들었다. 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 슬픈게 아니다. 그를 붙잡고 탱고를 추면서 나는 삶에 대한 강한 열망이 어떤 식으로든지 그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춤이 끝난후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더니 나를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시 다리를 걸어 내려왔다. 나는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