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재판주의
   
 


재판은 증거로 한다. 재판을 진행하다 보면 '판사님이 알아서 공명정대하게 판단해 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는다. 물론 판결은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불편부당한 판단이 돼야 한다. 하지만 민사재판에서 재판은 당사자가 자신의 주장을 하고 그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제시해 법원에 유리한 판단을 촉구하는 작용이다. 따라서 민사재판에서 재판장은 당사자의 주장을 듣고 증거를 토대로 사실을 인정한 후 법적 판단을 한다.
증거에 의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민사소송법의 기본원칙으로 증거재판주의라 한다. 그리고 증거를 제출하지 못한 경우 불이익을 받는 것을 입증책임이라 한다. 예를 들면 대여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는 피고에게 돈을 대여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책임이 있고 이에 반해 피고는 원고에게 돈을 갚았다는 사실을 증명할 책임이 있다. 원고가 돈을 대여한 사실을 증명하지 못할 경우 입증책임에 따라 원고가 피고에게 돈을 대여한 사실이 없다고 인정돼 패소하게 된다. 피고 역시 마찬가지로 변제 사실을 증명하지 못하면 소송에서 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돈을 빌려줬고 이는 하늘도 알고 상대방도 알고 있다고 강변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막상 법정에서 상대방에게 물어보면 돈을 빌린 적이 없다고 다툰다. 누군가는 분명 거짓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재판장으로서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당사자 사이의 사정은 그 누구보다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음에도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경우 법원은 결국 입증책임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를 제출하는 당사자의 주장을 믿을 수밖에 없다.
점점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예전엔 서로 이심전심으로 알고 있었던 사정도 이제는 명확하게 자료로 남겨 놓아야 하는 것이 많아진다. 사회가 각박해진다고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서로의 권리관계를 명확하게 해 둠으로써 장래 발생할지도 모르는 더 큰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 현재 법원에서 다투어지는 사건 중 절반 이상이 법리적인 문제보다는 사실인정의 문제이다. 실체적 진실은 하나인데 당사자 사이에서 진실은 엇갈리는 것이다.
앞으로는 아는 사이에 너무 매몰차단 생각이 들더라도 법률행위를 할 때에는 명확하게 권리관계를 명시하고 이를 자료로 남겨 둘 것을 권하고 싶다. 이러한 자료가 명백하게 존재하는 한 송사에 휘말릴 확률은 그만큼 떨어질 것이다.

/인천지방법원 판사 최욱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