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세월 견딘 '신비의 화령전' 슬픈 역사 간직

봉안됐던 진품 소실 … "세상 어딘가에 존재" 추정


'화령전'을 만나려면 화성행궁 안, 몇 겹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행궁 맨 뒤 오른편 끝에 자리한 화령전은 그러나 행궁에 속한 건물이 아니다. 그렇지만 '행궁의 심장'처럼 느껴지는, 원형 그대로 보존된 고건축물이다.
아침 햇살은, 화령전을 '반명반암'의 옷으로 치장해 놓았다. 빛 바랜 황금색, 아니 짙은 베이지색? 화령전의 색감을 정의하는 것은 무모한 행위다. 두 세기를 압축해 놓은 것 같은 빛깔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리. 태양과 바람과 비…, '200년 세월'이란 물감으로 채색된 화령전은 그렇듯, 느낌으로만 말할 수 있는 '고색창연'한 빛을 내뿜고 있다.

파르테논신전 같은 6개의 기둥, 여러 색의 벽돌로 엇갈려 쌓아 독특한 문양을 이루는 뒷 벽면. 화령전은 외양에서도 결코 예사롭지 않다.
추녀마루 위에는 조각들이 앉아 있다.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서유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다. 이 '잡상'들은 추녀 위에 앉아 건물로 들어오는 악귀를 쫓는 역할을 했다. 화성행궁 안 다른 건물들에서도 잡상들은 종종 발견된다.
떨어져 보고, 가까이서 살피며 이리저리 셔터를 누르는 기자에게 다가온 김준혁(43·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 박사가 말한다.

"몇 년 전, 한 장관님이 화성을 찾으셨습니다. 건축물에 상당한 조예가 있으신 분이었지요. 그 분은 그 때 화령전을 보시더니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내쉬면서 '내가 이 건물을 보고 가지 않았으면 평생 후회했을 겁니다' 라고 말하시더군요."
전문가 아닌 누구라도, 화령전 앞에 선다면 숨을 몰아쉬곤 한다. 신비의 고건축물은 어쩌면 정조의 화신일지도 모른다.
화령전 안을 들여다 본다. 인자하면서도 근엄한 표정의 정조대왕께서 이 쪽을 바라본다. 화령전은 바로 정조의 '어진'(초상화)를 봉안한 곳이다.

정조의 어진은 평생 세 차례 그려졌다. 이를 '도사'(圖寫)라 한다. 어진의 하나는 익선관 곤룡포를, 다른 하나는 원유관 강사포를 쓴 그림이었다. 화령전에 걸린, '융복'(군복)을 입은 모습이 마지막 초상화다. 모든 국왕은 10년에 한 번씩 어진을 그려야 하는 조선왕실 내규에 따른 조치였다.
정조가 굳이 융복 입은 어진을 고집한 것은 군복을 즐겨 입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영향 때문이다. 효자인 정조는 행차 때 군복을 입음으로써 아버지를 추존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는 자신이 군사권을 가진 왕이란 사실을 각인시키는 행동이기도 했다. 정조는 나아가 아버지가 묻힌 현륭원 재실에 융복 입은 자신의 초상화를 둠으로써 선친에 대한 효행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그런 왕은 1800년 음력 6월28일 승하한다. 갑작스런 왕의 죽음 앞에 조정의 대신들은 적잖이 당황한다. 다른 일도 일이었지만, 현륭원에 있는 정조의 어진을 어디에 봉안할 것인가가 큰 고민거리였던 것이다. 어진은 궐 밖으로 나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관리돼야 하는 보물이었다. 어진이 궐 밖으로 나간 왕은 태조 이성계가 유일하다. 태조의 어진은 고향인 함흥을 비롯해 평양·개경·경주·전주에 나누어 봉안됐다. 다른 왕들의 어진은 창덕궁 안 '선원전'에 보관되고 있었다.
오랜 시간 '갑론을박'을 벌이던 대신들이 마침내 묘안을 짜낸다. "정조대왕마마께서는 수원을 너무 사랑하셨소, 어진을 모실 사당을 수원에 만들기로 합시다."

화령전은 그렇게 정조 승하 이듬해인 1801년 화성행궁 옆에 건립된다.
문제는 현재 화령전의 어진이 두세 기전 그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이 초상화는 우당 이길범 화백이 지난 92년에 이어, 2005년 두 번째로 복원한 작품이다. 그렇다면 진품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1908년 일제는 정조어진을 선원전으로 옮긴다. 그로부터 40여 년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의 한 창고에 보관하던 어진은 창고에 불이 나면서 소실됐다는 게 지금까지 전해지는 얘기다.
김준혁 박사는 그러나 정조어진이 우리 나라, 아니면 일본, 미국 등 전세계 어딘가에는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저는 당시 창고화재가 의도적 방화라고 봅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어진은 누군가에 의해 빼돌려졌다는 얘기가 된다. 다시 말해 세상 어딘가에 어진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2005년 새롭게 그려진 어진은 '정조실록'에 따라 그린 것이다. 정조실록은 막 태어난 정조를 본 영조가 "이 아이의 이마가 나를 너무도 닮았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지금 화령전의 어진은 진품과 차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신의 의지와는 정반대로, 그토록 사랑하던 땅을 떠나 '수구초심'하고 있을 왕의 영혼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인간의 탐욕은 과연 하늘마저 집어삼킬 것인가.
/글·사진=김진국기자 blog.itimes.co.kr/freebird




■ 정조대왕은 무엇을 좋아했을까

신하와 소박한 술자리 즐겨


불취무귀(不醉無歸). 거창한 4자성어가 아닙니다. 정조대왕께서 술자리 때 즐겨쓰던 말입니다. 정조는 취하지 않은 신하들은 집에 보낼 수 없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 정도면 왕이 얼마나 술을 좋아했는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정조는 학문을 좋아하는 군주였기 때문에 음주를 항상 경계했지만,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많은 양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음식욕심은 많지 않아 소식을 했습니다.
정조는 입에 맞는 반찬 하나면 식사를 했습니다. 특히 신하들과 함께 밥 먹으면서 얘기하는 걸 즐겼는데, 회식이 끝나면 신하들로 하여금 남은 음식을 모두 가져가도록 했지요. 이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누구보다도 자상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낭비를 싫어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 정조는 어린시절부터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곤룡포와 면류관, 융복을 빼고는 비단옷보다 목면을 즐겨 입었습니다. 새옷을 찾기보다는 입던 옷을 빨고 기워 입었으며, 화려한 문양을 입혀 조각한 그릇도 쓰지 않았습니다. 어려서도 그는 갖고 놀던 물건을 싫증내 버리는 일이 없을 정도로, 무엇하나 꾸준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정조의 취미는 글쓰기와 책읽기였습니다. 몸이 아프고 근심이 있을 때도 책을 읽으면 피로가 풀린다고 말하는 그였습니다. 조심성이 많고 꼼꼼한 그의 성격은 매일 일기를 쓰기도 했지요. 정조가 위대한 정치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성품과 노력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렸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