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나르시시즘에 홀린 '서구인의 몰락'
▲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중 아랍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다마스커스 정복에 나선 로렌스의 모습.
▲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중 아랍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다마스커스 정복에 나선 로렌스의 모습.

“정해진 건 없소!”

영국 장교 로렌스는 죽음의 사막을 건너는 도중 낙오된 부하 가심을 구하러 사막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하고, 알리 족장은 자살행위라고 극구 반대하며 가심의 운명을 신께 맡긴다. 알리 족장의 만류에도 사막으로 되돌아간 로렌스는 결국 가심을 구출해 옴으로써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 믿는 자신의 신조를 증명한다. 그리고 아카바 점령으로 또다시 기적을 일궈낸 로렌스는 이제 시나이 사막을 건너는 모험을 감행하며 '신'의 자리까지 넘본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수에즈 운하의 지배권 쟁탈을 두고 영국군과 터키군이 대치한 상황에서 아라비아 사막을 활보하며 분열된 아랍군을 통합하여 오스만 제국(터키의 전신)에 맞선 아랍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영국 장교 T. E. 로렌스의 일대기를 그린 영국 거장 데이비드 린 감독의 대표작이다. 특히 피터 오툴, 오마 샤리프, 앤서니 퀸 등 명배우들이 펼치는 명연기와 더불어 광활한 사막을 배경으로 70㎜ 와이드 스크린 화면에 펼쳐지는 압도적인 비주얼이 단연 압권인 스펙터클 대작이다.

 

서구인의 몰락 과정을 통해 반영한 '인간의 한계성'

오토바이 한 대가 화면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정차해 있는 모습이 부감으로 보인다. 잠시 후 한 남자가 다가와 오토바이를 세심하게 점검한 후 시동을 건다. 쭉 뻗은 길을 따라 과속으로 달리던 오토바이의 질주는 탈선하여 언덕 너머로 추락하면서 끝난다. 그리고 한 서구인의 운명도 종말을 맞는다. 영화는 로렌스의 허망한 죽음으로 시작하며 한때 서구 문명을 경전 삼아 스스로를 영웅, 선지자, 심지어 신으로 자처했던 한 서구인의 몰락 과정을 조명한다.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가 정점에 이르렀던 20세기 초, 영국은 아메리카, 아프리카, 인도 등에 이어 아라비아 반도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 영국은 그 야심을 숨기고 시인이자 학자인 정보국 소속의 로렌스 중위를 아라비아에 파견하여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맞선 아랍군을 후원한다. 총, 대포 등 서구의 무기를 앞세워 아라비아의 땅을 정복하려는 영국군과는 달리, 로렌스는 자유, 이성, 평등, 박애 등 서구의 가치를 내세우며 아랍의 독립을 이끎으로써 아라비아의 혼을 정복하려고 한다. 불가능해 보였던 아카바를 점령하자 성공에 도취된 나머지 그는 자신을 신처럼 숭배하는 두 아랍 소년을 데리고 시나이 사막을 통과하며 모세의 여정을 쫓는다. 그러나 그의 신성모독적 행동으로 소년 하나를 잃고 이때부터 그의 운명은 피할 수 없는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아랍인들의 신도, 선지자도 되지 못한 로렌스는 마지막으로 다마스커스에 아랍의회를 세워 아랍인들에게 안김으로써 영웅이 되고자 한다. 그의 마지막 바램은 무참히 부서지고 영국에게든 아랍에게든 다용도 칼에 불과했던 그는 대령 진급에 만족해야 하는 허탈한 운명만이 남겨진다. 사막을 떠나는 순간, 로렌스는 시야 앞으로 질주해 온 오토바이가 흩뿌린 먼지 속에서 자신의 마지막 운명을 본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독일의 사상가 슈펭글러는 문화에서 문명으로의 이행은 무기적인 것을 향한, 종말을 향한 거보(巨步)이며 제국주의야말로 종말의 전형적인 상징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1차 대전을 기점으로 서구 문명은 몰락으로 치달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를 꿰뚫어본 아우다 족장은 서구 문명을 좇는 알리 족장과는 달리 하늘을 우러르며 외친다. “알라후 아크바르!(오직 신만이 위대하시다!)”

/시희(SIHI) 베이징필름아카데미 영화연출 전공 석사 졸업·영화에세이스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