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드는 것에 감사하며

여배우 윤여정씨에 대한 오스카 수상소식으로 들썩인다. 그 분의 솔직한 언행으로 인해 젊은 세대들이 환호하고, 걸핏하면 가져다 쓰는 K 타이틀을 빌어 K-할머니란 말이 나올 만큼, 요즘 그 분은 한국 사회에서 핫Hot 그 자체인 듯하다. ‘윤며들다’ 라는 신조어도 발생했다니까. 생각컨대 개인적인 어려움을 이겨내는 삶의 과정이 자연스럽게 그 분의 연기에 녹아들었을 게다. 생계를 위한 연기를 했다는 발언에, 사실상 연예인들은 웬지 다른 세계에 속한 그룹이라 여겨졌던 기존의 내 생각에 균열이 왔다. 아, 그들도 보통사람들이 겪어 내는 일상의 삶을 살고 있는 부분이 있구나. 어쩌면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직업군에 속한 의외의 외로움과 고독이, 화려해 보이는 겉모습 뒤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싶었다.

누구나 아픔은 한 입 베어물면서 산다. 그것이 겉으로 얼만큼 드러나는 지는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자기 절제가 강하게 자리잡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하게끔 단지 처세를 잘하는 것 뿐이다. 아픔이 진할 수록 겉으로 나타나는 얼굴은 더 환할 수 있다. 감추고 싶은 부분을 가리고자 함이거나 혹은 이미 깊이 승화시켜 내재된 인격으로 드러나는 걸 수도 있다. 평소 지탱하고 있는 줄을 다잡고 지내다가 비록 어느날 갑자기 무너져버리는 바람에 주변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막내아들이 사춘기를 심하게 겪으면서 이리저리 충동질을 하며 문제를 일으키던 시절. 평소 사람들과 말 잘하고 웃기를 자주해서 사춘기도 아닌데 왜 그리 까르르 웃는가 핀잔을 받기도 했던 내가, 어느날 갑자기 입을 닫고 지내던 때가 있었다. 모든 엄마들이 그렇겠지만 나는 그 아이를 마음에 두고 어찌나 아프게 지냈던 지 말하는 것 자체가 버거워서 글을 쓰고 피아노를 치고 성경을 읽고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이겨내려 애를 썼다. 어쩌다가 친구들을 만나면 말하는 대신 그냥 듣거나 소리없이 웃으면서 지냈는데, 그 과정을 지나고 보니 내겐 엄청난 인내를 배우게 했던 소중한 시기였다는 걸 알았다. 밖에서와 달리 집에서는 오히려 아이와 많은 얘기를 나눴고 때론 소리지르면서 미친 듯 우는 때도 있었지만 말이다. 겨우겨우 붙들어 매어 놓은 감정의 주머니가 실밥이 터지면서 와르르 쏟아지는 것처럼.

윤여정씨는, 인생은 한 번 살아볼만 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인생은 버리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그랬다.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을 버리지 않으면 채울 공간이 부족해서 새롭게 변화된 자신을 심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리 말했을까? 일흔을 넘긴 그녀가 아주 담담히 솔직한 얘기를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모습이 내게는 인생의 어려움을 잘 이겨낸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5월이다. 정연복 시인의 ‘5월의 다짐’, 초록 이파리들의/저 싱그러운 빛/이 맘 속/가득 채워/회색빛 우울/말끔히 치우리/살아있음은/아직 희망이 남아있다는 것/살아있음은/생명을 꽃피우기 위함이라는 것/살아있는 날 동안에는/삶의 기쁨을 노래해야 한다는 것, 이라는 대목을 기억하고 싶다. 예순을 넘긴 내가 일흔을 넘은 배우의 인상 깊은 뉴스를 접하면서, 인생의 젊은 시절 5월을 다짐하는 시가 왜 기억하고 싶은걸까. 그건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 기쁨을 창조하며 삶을 노래해야 할 의무를 내가 인식하고 있음이 아닌가. 아이들에게 어떤 엄마로 남을 지, 주변 친구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삶을 동행하고 있는 지를 새겨볼 의무 말이다. 그리고 빛으로 오신 그 분을 삶 속에서 전할 나의 의무이기도 할 터이다. 결국엔.

 

/Stacey Kim 시민기자 staceykim6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