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방직 공장 노동·산업 유산화 “시민사회 많은 관심 필요”


1978년 '동일방직 똥물 투척 사건' 당시 지부장으로 사측의 노조파괴에 저항
중앙정보부 '블랙리스트' 올라 취업길 막히자 현장 떠나 지역으로 방향 전환
모래내시장 부근에 세운 공부방, 자활후견기관 지정으로 7년간 센터장 맡아
가톨릭노동청년회·인천도시산업선교회와 옛 공장 건물에 박물관 건립 추진
▲ 지난 27일 인천 남동구 간석동 청솔의집에서 만난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동조합 지부장. 그는 20대 초 동일방직에서 노동운동에 헌신한 후 지금까지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길을 걸어온 것에 대해 자부심과 함께 감사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 여성의 이름으로 '총각'이라는 이름만큼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 있을까. 이총각(74) 전 동일방직 노동조합 지부장을 만나러 가며 총각이라는 이름에 사연이 없을 수 없겠다 싶었다.

실제 이총각은 어렸을 적엔 부끄러워했고, 성인이 된 후 노동운동을 할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숨겨야 했던 이름이었다고 했다. 외할머니가 사내아이일 것으로 기대했다가 여자아이가 태어나자 실망해 이름을 '총각'이라고 하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총각이라는 어감에서 오는 '거센 팔자'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이름을 자랑스러워한다고 했다. 이총각 전 지부장을 얘기하면서 그의 이름과 관련된 이야기에 특별히 주목한 이유다.

 

▲1970년대 '여공' 투쟁 역사의 상징 동일방직 똥물 투척 사건

역사학자 한홍구는 '자본주의화를 겪은 모든 나라에는 저마다의 슬프디슬픈 여공의 역사가 전해진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1970~80년대 벌어졌던 여성노동운동이 바로 그 시기였다.

푸른색 작업복을 입고 있는 여공 두 명이 옷에 똥물을 뒤집어쓴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으로 상징되는 '동일방직 똥물 투척 사건'이 벌어졌을 1978년 2월21일 당시 이총각은 동일방직 노동조합의 세 번째 여자 지부장이었다.

“당시 동일방직 노동조합은 노동자가 자유로이 노조에 가입과 탈퇴를 할 수 있는 오픈샵(open shop)이 아니라 회사 채용과 동시에 자동 가입되는 유니온샵(union shop) 형태였어요. 그래서 회사에서 노동자를 마음대로 해고할 순 없어도 노동조합에서 제명하면 회사에서 나와야 했죠. 그럼에도 사측의 노조파괴 사주를 받은 구사대 남자 조합원들이 노조 사무실에 들이닥쳐 그런 짓을 한 거였죠.”

나중에 그가 남자 조합원에게 왜 그렇게 우리를 못살게 굴고 탄압하냐고 따지자 '회사의 말을 안 들으면 다른 곳으로 강제 부서 배치를 당한다. 우리도 먹고살아야 하고 처자식이 있는데 어쩔 수 없지 않냐'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그는 '곤란한 사정은 이해한다. 그래도 나중에는 회사 눈에 잘 보이려고 앞장서진 말아달라'고 정중하면서도 분명히 경고했다고 한다.

당시 중앙정보부로부터 직접적인 통제와 지시를 받던 동일방직은 노조탄압 측면에서 적극적이었다. 노동자에게 노조탈퇴 각서를 요구하고 이를 거부한 여성 노동자 124명을 해고한 데 이어 이들의 주민등록번호와 본적 등을 기재한 명단을 만들어 전국 노조와 동종 업계 사업장 등에 뿌린 것이다.

그 이후로 이 전 지부장은 자신의 본명으로는 어느 회사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당시 학력이 높지 않은 여성들이 취업해서 갈 수 있는 곳은 성냥공장이나 방직공장, 봉제공장 정도뿐이었어요. 그나마 배운 게 이쪽이라 주안에 있는 봉제공장에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취업했는데 저를 감시하던 경찰이 회사에 제 신분을 알려줘서 쫓겨났죠. 이후 서구에 있는 공장에서도 비슷한 일로 얼마 못 가 회사를 나와야 했어요.”

 

▲ 지역 공부방 겸 지역운동센터였던 청솔의 집에 공부하러 온 아이들과 함께.
▲ 지역 공부방 겸 지역운동센터였던 청솔의집에 공부하러 온 아이들과 함께.
▲ 2008년 1월 인천남동지역자활센터장으로서 자활 대상자를 대상으로 상조회 결성한 후 연 정기총회.
▲ 2008년 1월 인천남동지역자활센터장으로서 자활 대상자를 대상으로 상조회를 결성한 후 연 정기총회.
▲ 2017년 희망재단 이사로 아프리카 우물·학교 지원 사업 방문.
▲ 2017년 희망재단 이사로 아프리카 우물·학교 지원 사업 방문.

 

▲노동자에서 가난한 지역주민 속으로 … 잊지 않은 '여성노동운동가'라는 정체성

이 전 지부장의 이름과 관련해 또 다른 에피소드도 있다.

경찰에 잡혀 교도소에 있게 된 총각에게 어머니가 면회를 와서 '무당에게 물어보니 니 이름이 팔자가 세서 그렇다. 개명하면 나아질 거라 하니까 일단 새 이름을 새긴 반지를 가지고 왔으니 끼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 반지에는 이총각이라는 이름 대신 '이은경'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반지를 받지 않았다.

“저도 총각이라는 제 이름이 마음에 들었던 건 아니지만 어머니가 반지를 가지고 온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받을 수 없었죠. 저로 인해 노동운동할 땐 경찰로부터 감시도 많이 받고 부모님한테는 참 불효를 많이 한 자식인 셈이죠.”

더 이상 현장에서의 노동운동이 어려워진 그는 지역운동을 시작했다. 가난한 지역에 들어가서 주민들과 함께하는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살고 있는 집 전세금을 빼서 구월동 모래내시장 부근에 공간을 얻어 처음에는 공부방으로 시작했어요. 그러다 2001년부터는 자활후견기관(현 인천남동지역자활센터)으로 위탁·지정 받으면서 7년간 센터장으로 있었지요.”

이 전 지부장은 가난한 사람들이 자활센터에 들어와 일을 시작하면서 달라지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여성노동운동가 이총각'이라는 정체성은 한시도 잊지 않았다.

“작년에 돌아가신 김병상 신부님과 대우자동차나 대우자판 등에서 노동운동이 벌어질 때 같이 찾아가거나 신부님에게 노동자들을 소개해 주는 '중간 심부름 역할'을 많이 했어요. 김병상 신부님은 동일방직 노동운동 당시 답동 성당 주임 신부님이셨죠. 그때 사제관에 찾아가서 종종 밥도 얻어먹고 또 저희를 위해서 기도회도 열어주셨는데 이제는 안 계셔서 많이 허전합니다.”

 

▲ 2018년 11월9일 청솔의집 개소 27주년 기념 동네 어르신 초청 떡국 대접 행사 모습.
▲ 2018년 11월9일 청솔의집 개소 27주년 기념 동네 어르신 초청 떡국 대접 행사 모습.
▲ 2019년 2월8일 인천 미추홀구 대강당에서 열린 실업극복운동본부 20주년 기념행사.
▲ 2019년 2월8일 인천 미추홀구 대강당에서 열린 실업극복운동본부 20주년 기념행사.
▲ 2019년 7월12일 비영리단체였던 청솔의집을 사회적협동조합 법인으로 변경한 후 열린 창립 총회.
▲ 2019년 7월12일 비영리단체였던 청솔의집을 사회적협동조합 법인으로 변경한 후 열린 창립총회.

 

▲남기고 싶은 유산, 동일방직 노동·산업 박물관 건립

최근 그의 관심은 지금은 폐쇄돼있는 동일방직 공장을 보존해 노동·산업 유산화 하는 것이다. 그가 투사선서를 했던 가톨릭노동청년회와 더불어 지역 노동운동의 산파와 피난처 역할을 했던 같은 동구에 있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보존대책협의회) 등과 연대해 일을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솔직히 쉽진 않은 일이죠. 작년에 들어갈 기회가 있어서 가봤는데 그 당시 교육실이나 체육관, 기숙사 건물 등이 그대로 남아 있더라고요. 최소 50년 이상 된 건물 자체만으로도 보존 가치가 있겠다 싶더라고요.”

그러면서 그는 “동일방직이 그러한 노동·산업유산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공간이 된다면 회사로서도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 과거 그곳에서 힘들게 일했던 노동자로서도 가슴 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계기가 되지 않겠냐”며 “지역 시민사회의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총각 전 지부장은 최근 집에서 가까이 있는 장수산에 자주 올라간다고 전했다.

“아직 건강을 잃지 않아서 산에 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걸으며 가끔 속으로 이런 기도를 해요. 지금까지 한 길을 걸어올 수 있어 감사하다고, 앞으로도 건강을 허락해 주셔서 이 길에서 너무 금방 소외되지 않게 해달라고요.”

 


 

이총각 청솔의집 대표가 살아온 길

 

이총각은 1947년 황해도 연백군 청연면에서 1남 6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51년 1·4후퇴 때 인천으로 피난 와 동구 화수동에 정착했다. 1966년 동일방직에 입사했고 가톨릭노동청년회(JOC)에서 받은 교육 등의 영향으로 1969년부터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78년 동일방직 '똥물 투척사건'을 거쳐 해고된 이후 인천교구가톨릭노동사목실, 한국노동자복직협의회 등에 소속돼 노동자들을 상담·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1991년부터 지역운동을 시작해 인천남동자활후견기관 관장, 한국자활후견기관협회 인천지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남동구 간석동 '청솔의 집' 대표를 맡고 있다.

/유희근 기자 allways@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