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개항(1883년) 이후 서구문물 유입의 관문 구실을 톡톡히 했다. 온갖 진기한 문물을 알리는 전시장이었다. '국내 최초'란 수식어가 수두룩한 이유다. 이 중 각종 공연예술에 한 획을 그은 곳이 있으니, 바로 협률사(協律舍)다. 인천 갑부인 정치국이 1895년 세웠다고 전해진다. 조선 황실이 1902년 서울 정동에 문을 연 협률사(協律社), 이인직이 1908년 종로에 창설한 원각사(圓覺寺)보다 훨씬 앞서 개관했다. 서울 협률사와 원각사가 관 주도로 설립된 반면, 인천 협률사는 국내 첫 사설극장이란 의미를 갖는다.

협률사는 1911년쯤 축항사(築港社)로 명칭을 바꿨다. 2층 건물로 정원 500명 규모였다. 축항이란 항구 축조로 근대도시로 변모하는 인천을 의미한다. 혁신단(革新團)을 이끌던 임성구 단장이 축항사를 작명했다. 혁신단은 민중을 계몽하겠다는 목적으로 조직한 우리나라 최초의 신파극단. 축항사를 통해 극작가 진우촌과 함세덕, 연기자 정암, 무대장치가 원우전 등이 등장했다. 축항사 개막에 즈음해선 조산부양성소에서 위생환등회를 열었는데, 무려 1500여명이 몰렸다고 한다. 그 후 용동기생조합 공연도 축항사에서 펼쳐졌다. 여기서 1912년 초 혁신단이 공연한 신파극 '육혈포강도(六穴砲强盜)'는 큰 인기를 끌며 인천 신연극의 효시로 기록된다.

축항사는 이어 1915년 새로운 이미지를 꾀하며 애관(愛觀)극장으로 개칭됐다. 결국 지금 애관의 전신은 협률사와 축항사로, 그 이름만으로 100년을 넘긴 셈이다. 이 때부터 연극과 영화를 주로 올리는 상설관의 면모를 갖춰 이어나갔다. 해방 후 한동안 애관은 영화뿐만 아니라 강연회·연극·음악회 등을 종종 개최한 다문화복합공간으로 유명했다. 이렇다 할 공연 장소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세계적 음악가 번스타인의 피아노 연주회, 당대 최고 춤꾼 최승희의 자취 등이 남아 있다고 한다. 애관극장은 1960년 재건축된 후 몇 차례 주인을 바꿔가면서 오늘에 이른다. 이랬던 애관극장이 경영난으로 폐관 위기를 맞아 안타깝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관람객 감소로 운영난을 겪으면서 매각설에 휩싸이고 있다. 애관극장은 경영난에 시달리면서 2018년 한차례 팔릴 상황이었지만, '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들이 나서 매각에 반대하고 인천시에 인수를 촉구했다. 마침내 극장주가 매각 의사를 철회하면서 팔릴 운명에선 벗어났지만, 또 다시 어려움으로 매각설이 불거졌다. 이에 따라 인천시민들은 '제2기 애사모'를 꾸려 애관극장 살리기에 나섰다. 이들은 지난 20일 기자회견을 열고 “애관극장이 사라지지 않게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애관극장이 인천시민들을 위한 상영관이자 문화시설로 존속될 수는 없을까. 애사모는 이날 인천시에 애관극장의 공공 매입을 통한 항구적 보전 대책 수립, 원도심 복합역사문화공간으로 다양한 활용 방안 모색, 원도심 상생발전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 마련 등을 촉구했다. 전향적인 인천시의 대응 방안이 주목된다.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