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낳아 주신 어머님은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나에겐 우크라이나 어머님이 계시다. 논문 지도교수님이신 코스텐코 나탈리아 바실레브나 (Kostenko Natalia Vasiliivna) 어머님이다. 1997년 학위를 끝내고 키예프국립대학교에서 같이 근무하게 되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몇 년 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손자같이 두 분 가는 길을 배웅했다.

그리고 어느 날 교수님께 나에게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말했더니 선생님은 조용히 나를 포옹해 주셨다. 미혼의 어머님은 농담으로 “쉐브첸코(필자의 학위논문 시인)와 결혼하여 너를 낳았구나”라며 좋아하셨다. 매년 1월20일 어머니 생신에는 20년 넘게 교수님 친구, 가족 친지와 조촐한 생일잔치를 벌인다. 요즘은 코로나 사태로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전에는 가끔 오페라 하우스도 갔고 한 달에 한두 번은 안부 전화를 드린다.

지금까지 쓰신 책에는 항상 '사랑하는 아들에게'라는 글귀를 써 주셨고 나도 책을 내면 가장 먼저 '사랑하는 어머님께'라고 써서 드렸다. 어머니는 맘속 깊은 말씀도 쉽게 하는 마술과 유머가 있다. 애들이 어렸을 때는 선생님 댁에서 잔도 깨고 사소한 일이 많았지만, 항상 너그러운 마음으로 등을 두드려 주셨다.

어머니가 아프셔서 병원에 모시고 갔는데 의사가 누구냐고 물으니 어머니가 “내 아들이요”라고 했더니 의사가 박장대소하며 “절대 그럴 리가 없어, 내가 귀신에 홀렸나” 하며 웃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 시골집(여기서 다차라고 부르는 시골집)은 키예프에서 80여 ㎞ 떨어진 곳인데 일 년에 한두 번은 모셔다드린다. 시골에서 나는 감자_양배추_토마토_사과 등을 주시는데 농약을 안 쳐서 수확물은 아주 빈약하다.

나는 해마다 어머니께 “이제 그만 사서 드시라”고 말해 핀잔을 듣는다. “아들아, 너는 아직도 땅의 이치를 모르는구나!” 국적은 틀려도 나의 우크라이나 어머니는 항상 아들 걱정을 하시는 한국 어머니와 똑같다.

1999년 고려대와 학술교류 협정이 체결되어 1명의 교환학생을 보내게 되어 교환학생 선발 시험을 본다고 공고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누구누구를 보내 달라는 부탁성 압력이 들어왔다.

모든 것을 뿌리치고 로만이라는 학생이 1등이라 그 학생을 고려대에 보냈다. 그 후 그의 아버님이 몇 번을 초대한다고 간청을 해서 보그슬랍 (Bohuslav)이라는 시골 마을에 갔다.

동네 사람 여럿이 오셔서 동양인을 맞이했고 어떤 사람은 동양사람 처음 본다고 얼굴도 만지고 동네잔치가 벌어졌다. 학생 아버님(Romanchuk Dmitro Yakovych)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부자도 아니고 아무 힘도 없는데 우리 아들을 교환학생으로 보내주어서 고맙다”며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그 후 우리는 시간 날 때마다 시골에 갔고 어느 날 술을 마시고 학생 아버님 드미트로 씨에게 한국어로 제가 형님 할 테니, 형님은 동생이라고 말씀하시라고 부탁했더니 그 후 몇 번 연습하셨고, 나는 그의 동생이 되었다. 우리 집 수리할 때도 오셔서 말씀 없이 고쳐 주시고, 자작나무 물이 좋다고 전화해 주시고, 부활절이나 연말에는 그 집에 갔고, 방학에는 시골집 가듯 형님댁에 가서 지냈다.

어느 토요일 불현듯 형님 생각이 나 차를 몰고 가서 별말도 없이 술잔만 기울이다 다음날 돌아왔다.

어느 해 형님은 위암 진단을 받아서 키예프에서 수술하셨다. 나는 몇 차례 병문안을 갔다. 집에 있는 인삼차를 드리며 “약은 아니고 몸에 좋은 차”라고 말씀드렸는데 형님은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약 드시듯 하루 한 잔 차를 마셨는데 몸이 좋아지셨다고 해서 몇 년간 인삼차를 구해 드렸다. 그리고 5년 후 완치가 되셨는데 드미트로 형님은 인삼차가 자신을 치료한 것 같다고 믿으시며 내가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신다.

인간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아도, 인종이 틀리고 피부색이 달라도 따뜻한 마음이 있으면 부모자식이 될 수 있고,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살며 얻은 가장 큰 재산은 어머님과 형님이다.

 

/김석원 국립키예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