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의 가슴은 어느새 아스팔트로 포장돼 있다. 그래서 생명의 싹이 움틀 여지가 없다. 인생이 한없이 힘들게 느껴지고 찐득거리는 고통의 덩어리에 두들겨 맞아 암담한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면 집에서 나와 나무들이 있는 곳까지 걸어보라. 산이 아니어도 좋다. 작은 농장을 지나 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 조용히 심호흡을 해보라. 침묵을 넘어 고요를 깨치고 저 멀리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으로부터 희망의 새싹이 아롱아롱 솟아오르는 것이 보이리라.

하늘로 눈을 돌렸을 때 청둥오리 떼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우울한 생각을 쫓아내는 데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수 백~수 천㎞를 날아와 겨울을 나고 다시 돌아갈 채비를 하는 청갈색의 알록달록한 오리들! 저 작은 깃털로 상상하기 어려운 먼 길을 오고 가는 오리에게서 상쾌한 기분 전환과 치유를 맛본다.

과학적 근거도 있다. 2007년 마드리드대학교와 노르웨이 생명대학교의 연구서에 따르면 자연경관을 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나 정신적 피로가 해소돼 질병에서 회복되는 속도도 빨라진다고 한다. 식물이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감염을 막기 위해 생성하는 '피톤치드'는 인간의 면역계와 순환계 등에도 일부 같은 작용을 한다. 자연과의 접촉은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해 우울증을 완화한다. 우울한 사람에게 삼림욕이 도움이 되는 이유다.

숲으로 산책을 나가 나뭇잎사귀나 새의 깃털, 수석 등을 찾아보는 것도 기분 전환이 된다. '채집황홀'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새로운 환경을 탐험하고자 자원을 찾아 나서면 도파민이라는 뇌신경 전달물질이 분비돼 일시적 흥분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고려 말 보우 스님이 쓴 '운산음(雲山吟)'이라는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웃으면서 말하네/ 왜 빨리 돌아와 내 벗이 되지 않았는가/ 그대 푸른 산 사랑하거든/ 덩굴 풀 속에서 편히 쉬게나".

39년 교직생활 정년퇴직 후, 퇴직한 중등교장 10여 명이 모여 노노회(NO老會)란 등산 모임을 만들었다. 운연동 소래산 밑 김 교장의 텃밭에 있는 작은 농막은 우리가 가끔씩 모이는 놀이터다. 농장에서 기른 오골계나 푸성귀들을 안주 삼아 막걸리 잔을 나누는 모임이 있는 날, 필자는 몇 정거장 앞선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언덕길을 걷고 있었다. 한적한 농가를 지나면서 시상이 떠올랐다. 그래서 지은 시가 '언덕길'이다.

자연은 힘이 세다. 고운 잿빛 털로 덮인 강아지처럼 보송보송해 '버들강아지'라 불리는 버드나무 수꽃이 거센 바람과 빗줄기를 이기고 끝끝내 머리를 내민다. 한 가닥의 잔잔한 바람이 꽃향기를 내 코끝에 들이민다. 어느새 다정한 눈빛, 정겨운 음성이 느껴지며 식었던 가슴이 훈훈해짐을 느낀다.

 

언덕길

 

운연동 농장으로 가는 길

꽃들은 다투어 피어나는데

분봉하는 벌들 어지럽게 하늘을 나는데

목줄에 매인 개 한 마리

마당 한 쪽 디딤돌에 턱을 받치고 졸고 있다

 

소래산이 눈을 뜨고 기웃이 내려다보듯

텃밭까지 내려온 곤줄박이 슬픈 귀를 대어보듯

얼레지 보랏빛 언덕길로 숨을 몰아가다

긴 호흡으로 눈꺼풀이 무거워진 바람

 

그 바람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파라오의 비밀처럼 하얀 속살

부피도 무게도 없이 내 손등 위에 떨어진다

 

저만치 때까치 소리에 놀라 잠 깬 개울물

산허리 꽃길을 따라 깊게 흐르다가

어느새 내 눈언저리에 그렁그렁 고인 소래산 언덕길

 

/신규철 시인·전 부광여고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