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는 19일 오후 인천 숭의동과 중구청 일원에서 ‘인천지역 4.19 혁명 운동’ 역사 현장 답사 행사를 개최했다.

인천광역시의 지원을 받아 ‘2021년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이 행사에는 일반 시민과 지부 회원 등 40여 명이 참석했다.

옛 시외버스터미널 주변인 숭의역에서 집결한 답사단은 오후 2시부터 숭의동 공구상가, 싸리재, 경동파출소 자리를 거쳐 옛 인천시청 청사인 중구청 앞까지 2시간여의 탐방을 이어갔다.

해설을 맡은 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는 4.19 혁명의 흔적이 남아있는 현장을 지나면서 당시의 전개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 ‘인천지역 4.19 혁명 운동’ 역사 현장 답사 참가자들이 ‘4.19 혁명 기념비’가 설치된 경동사거리(옛 경동파출소 앞)에서 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 1960년 3.15 부정선거 하루 전 시작된 인천지역 학생 시위

인천지역의 4.19 혁명은 이승만 정부에 의해 자행된 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됐다.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을 동시에 선출하는 1960년 3.15 선거일을 앞두고 상황이 불리해진 이승만 정권은 공무원과 경찰은 물론 정치깡패까지 동원한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이에 항의하는 대구학생들이 2월 28일 의거를 일으키자 이 불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천으로 번져왔다.

선거 하루 전인 3월 14일 인천고와 제물포고, 송도고, 동산고 학생 30여 명이 ‘공명선거 실시’와 ‘학원자유화’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다음날인 3월 16일에는 민주당 인천시당 당원들이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준비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좌절되고 말았다.

▲ ‘4.19 혁명 운동 현장 답사’ 안내를 맡은 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가 4.19 혁명 당시 인천지역 학생 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학생, 노동자, 시민들, 이승만 정권 퇴진 시위에 가세

4월 19일에 이르자 인천지역 학생들과 인천항 부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일제히 거리로 뛰쳐나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를 벌였다.

이날 인천공업고등학교 학생 300여 명이 수업을 거부하고 가두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일부 학생들은 교사들의 만류를 피해 수봉산을 넘어 시내로 모여 들었다.

시위 대열에는 남인천여중과 인천여자상업학교, 인천여고 등 여학생들도 대거 동참했다.

이들은 자유공원과 동인천역 광장, 제물포역 광장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이며 시청 집결을 목표로 플랜카드를 들고 행진을 했다.

하지만 저지선을 구축한 경찰이 소방차를 동원해 물을 뿌리며 행진을 저지하자 돌을 던지며 저항했으나 강제해산 당하고 말았다.

4월 20일에는 인천사범학교 학생 300여명이 숭의동 청과시장 앞에서 “경찰은 민주적 학생 데모에 총칼을 쓰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21일에는 인하대 공대생 200여 명이 경동파출소 앞에서 연좌시위에 나섰다.

▲ 학생 시위대가 플래카드를 들고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제공=조우성 인천일보 주필

- 경찰의 무력진압에도 3천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

4월 22일이 되자 시위대는 3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날 오전 9시 30분부터 인천 시내 남녀중고교생 300여 명이 숭의동 로터리에 산발적으로 모여들었고 초등학생들도 가세했다.

학생들은 혜광사 앞 집결한 뒤, 율곡동 일본인 묘지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해 시내로 진입을 시도했다.

4개 대열로 나뉜 시위대는 경동파출소 앞, 시청 앞, 자유공원, 동인천역, 배다리 중앙시장을 거쳐 만석동으로 행진을 이어갔다.

이 때 경찰이 학생들을 향해 발포해 1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경찰봉과 총 개머리판으로 구타를 했지만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자 결국 수수방관하고 말았다.

시위대는 “경찰은 학생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말라, 연행된 학생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다 오후 4시 경 자진 해산했다.

4월 23일에는 자유공원에 중고교생 300여 명이 시위를 오전부터 시위를 시작해 동인천역, 시청 앞 지나 동인천경찰서 앞에서 ‘살인경찰 물러나라’고 항의했다.

이날 동인천경찰서 앞 집회와는 별도로 여중생 300여 명이 플랜카드를 들고 집회를 벌였으며, 남인천여상 학생 150여 명도 시청을 거쳐 시내로 행진했다.

오후 7시 경에는 신흥동 네거리에서 증·고등학생 200여 명이 횃불집회를 시작해 답동네거리와 경동파출소, 동인천경찰서를 거쳐 오후 9시 40분 경 동인천역 광장에서 만세 삼창을 부르고 자진 해산했다.

이를 지켜보던 거리의 시민들도 시위대에게 음료수를 나눠주고 박수를 보내며 호응했다.

송도고등학교 학생 500여 명은 4월 24일 오전 시내에 집결해 4.19 순국학생 추도식을 거행한 뒤 1천여 명으로 불어난 시민들과 행진을 벌였다.

▲ 트럭을 타고 경비를 돌고 있는 경찰관들. 경찰차가 주차돼 있는 경찰서 뒤로 멀리 답동성당이 보인다. /사진제공=조우성 인천일보 주필

- 이승만 하야 이후 학생 시위 막은 교사들 반성 집회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4월 27일 특별담화를 통해 하야를 발표했다.

이날 인천고 학생 500여 명이 “민주 반역자 이기붕을 때려죽이라”고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던 중 이 소식을 듣고 해산했다.

서울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 200여 명은 인천시청으로 내려와 “우리는 승리했다”를 외치며 인천 시가를 행진했다.

인천학우회를 중심으로 구성된 ‘인천학생수습대책위원회’는 이날 인천시청과 경동파출소에 본부를 설치하고 경찰과 협력해 치안 회복에 힘을 쏟았다.

4월 28일에는 인천공고 교사들이 답동 광장에서 4.19 당일 학생시위를 막은데 대한 반성을 하며 “학생에게 자유를 달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내 행진을 했다.

인천고 교사 40여 명도 4월 30일, 4월 혁명 당시 교장이 시위를 막아 학교와 교직원의 명예가 실추됐다며 교장의 퇴진을 요구했고, 학생들도 교사에 호응해 수업을 거부했다.

 

- 성대하게 개최된 인천지역 4.19 혁명 1주년 행사

4.19 혁명 1년 뒤인 1961년 도원동 운동장에 수천 명의 학생들이 모여 ‘혁명 1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인천공고 밴드부의 축하 연주 속에 유가족에게 꽃다발과 위로금이 전달됐다.

학생들은 “학생들의 피를 헛되이 하지 마라”, “자유와 진리를 위해 단결하라”, “학생들을 정치에 이용하지 마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기념식을 마친 뒤 참가자들은 창영초등학교와 미림극장, 화평동 철교를 지나 동인천역으로 행진했고, 한쪽은 신흥동, 인천여상, 동방극장, 시청 앞을 지나 해안동 로터리에서 해산했다.

4.19 혁명 기간 중 많은 사람이 부상하고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현재 기록에 남아 있는 인천연고 사망자는 도원동에 거주하던 장동원 씨가 유일하다.

4월 19일 내무부 앞 시위 도중 총상으로 숨졌으며 1963년 9월 20일 국립 4.19 묘지에 안장됐다.

또 다른 기록에는 이름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인천고등학교 박 모 군이 경찰관에 의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 4.19 혁명 운동 인천지역 현장 답사를 마친 뒤, 참가자들이 인천 중구청(옛 인천시청)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인천기계공고에 남아 있는 4.19 혁명의 기록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교정에는 인천공업고등학교와 경인중학교 학우회장 명의로 설치된 ‘4.19 학생의거 기념탑’과 비문이 남아 있다.

하지만 비문 내용의 일부에 5.16 군사 쿠데타를 찬양하는 문구가 남아 있어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인천민주화운동센터는 지난해 12월, 인천에서 전개된 ‘4.19혁명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경동사거리와 인천 중구청 앞, 강화중학교 등에 ‘4.19 혁명 기념비’를 건립했다.

 

/정찬흥 기자 report6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