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신록의 연초록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계절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1년 중 가장 쾌적한 날씨다. 이렇게 연초록이 아름다웠던 1919년 4월 제암리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마도 화성시민 86만여명 중에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제암리는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에 있는 작은 농촌마을이다. 두렁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두렁바위 또는 제암이라 한데서 제암리라는 명칭이 생겼다.

화성시하면 떠오르는것은 삼성 반도체공장, 기아자동차, 한미약품 등 대기업들이 즐비하고 몇 년 전만 해도 대단위 아파트들이 끝없이 들어서고 있어서 내 집 마련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주목했을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제암리 학살사건이 발생한 곳이라는 점이다.

'제암리 학살사건'이란 1919년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행위로 일본 군경이 수원군 향남면(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 사는 민간인 20여명을 학살하고 민가 30여호를 불태운 참변(출처: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수원 제암리 참변)이 발생한 곳이다.

제암리에서는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고 다만 마을 사람 중 몇 사람이 발안장터의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1919년 4월15일 오후 일본군 보병 중위 아리다도시가 이끄는 보병 11명과 순사 2명이 제암리에 도착하여 강연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와 천도교 남자 신자 20여명을 기독교 교회당에 강제로 모이도록 했다.

그런데 이들은 돌연 출입문과 창문을 굳게 잠그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총칼로 학살한 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질렀는데, 불길이 5시간쯤 타올랐다. 이때 일본군은 불 속에서 뛰쳐나오거나 길에 나왔다가 달아나는 사람에 대해 발포하거나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교회당으로 끌려간 한 남자의 부인은 일본 군경에 의해 자기 집이 불길에 싸이게 되자 이부자리를 끌어안고 마을 밖으로 뛰쳐나오다가 산 위에서 망보고 있던 일본군의 칼에 찔렸다.

일본군은 제암리교회에서 학살을 한 후 고주리로 달려가 김홍렬씨 등 일가족 6명을 만세주도자로 몰아 총살하였다. 4월5일 발안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제암리교회에서 주도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제암리 사건은 3·1운동 기간 중 일어난 일본 경찰 및 군인들의 폭력적 만행과 그로 인해 우리 민족이 받아야 했던 수난사건이다. 이러한 제암리 사건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이며 선교사인 영국인 스코필드(schofield.f,w)에 의해 알려졌다고 한다.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 가면 이런 역사현장을 생생히 기록한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가 있다. 이곳에서 화성시에서 주관하는 4·15제암·고주리 학살사건 희생자 참배가 4월15일에 있을 예정이다.

세계여행을 다니다 보면 그 지역의 역사현장을 잘 간직하여 관광객들이 자주 찾아오는 곳을 많이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자녀들에게 조상들의 수난받은 사실을 기억하고 교육하는 일에 소홀함이 없다고 한다.

화성을 방문하거나 여행할 계획이 있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 작은 농촌마을 제암리에 있는 3·1운동 순국유적지를 꼭 둘러보고 그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기억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역사현장을 방문해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의 소중함 뒤에는 우리 조상들의 아픈 희생이 있었음을 생각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임경희 경기남부보훈지청 보훈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