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대 인천시의원 원미정

“그때 긴 안목으로 의정활동을 할 걸 아쉬움이 남습니다. 지금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요.”

'인천시의회'는 시대적 사명과 맞닿은 필연이었다. 8년의 세월, 치열하게 의정활동을 했고 많이 깨졌다. 현실 정치에 좌절도 했지만 여성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노동자와 약자를 대변하기 위해 잠시도 머뭇거릴 수 없었다.

그렇게 원미정(61·사진) 인천여성가족재단 대표이사는 1995년 2대 인천광역시의회로 시간을 거슬러 올랐다.

원 대표이사는 “당시 인천지역 진보진영에서는 노동과 여성, 약자와 소외계층 등을 대변할 수 있는 시의원 후보를 추천했고, 상당수가 시의회에 첫발을 내디뎠다”며 “1대 시의회 선배들이 닦은 기반 위에서 2~3대 시의회는 시민 행복에 대해 치열한 고민을 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인천 환경 문제는 최대 화두였다. 도시 근간을 혼들만큼 환경 사안들이 인천에 휘몰아쳤다.

원 대표이사는 “1995년 34년 만에 인천시민이 뽑은 시장과 군수·구청장 등 민선1대를 맞았고, 시의회는 2대에 들어섰다”며 “그해 굴업도핵폐기장을 막기 위해 시의회는 물론 인천시민 모두가 앞장서서 인천을 지켜냈다”고 말했다. 그리고 “영흥도 화력발전소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었기에 계획보다 축소시키는 성과를 거뒀다”며 “그때도 수도권매립지의 쓰레기 처리 문제는 시민 모두의 고민거리였다”고 설명했다.

자연스레 민선7기 박남춘 인천시장이 강조하는 친환경 자원순환 정책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원 대표이사는 “인천여성가족재단도 시의 친환경 자원순환 정책이 안착할 수 있도록 관련 교육과 정책을 준비 중”이라며 “시민 모두가 기후변화의 심각한 위기, 그리고 2025년 수도권매립지 종료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또 300만 인천시민과 함께 하는 친환경 자원순환 정책을 토대로 수도권매립지 2025년 종료가 핵심 사안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원 대표이사는 2대 시의회 때 여성 시의원이 처음으로 등원한 것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지방자치 30년간 시의회에서 여성 정치인이 성장하지 못한 것에 선배 여성 의원으로서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인천시의회 여성의원은 2대 3명, 3대 4명에서 8대 시의회 2명으로 줄었다. 8대 시의회에서는 비례대표 여성 의원만 있을 뿐 지역구 시의원은 없다.

원 대표이사는 '연구하는 시의회' 풍토를 만들었던 2대, 3대 시의회를 떠올렸다.

원 대표이사는 “굴업도 핵폐기장과 영흥도 화력발전소 설치, 입법과정 등을 겪으며 지방의회의 가능성과 한계를 경험했고 해야 할 일과 할 일은 많았지만 보좌관 제도를 도입할 수 없었던 문제에 부딪혔다"며 “그래서 고안한 게 시의회 연구단체였다”고 말했다. 이에 “연구단체를 통해 전문화된 시의회의 발전방향을 논했고 이를 바탕으로 현 8대 시의회에서 활발한 연구단체와 적극적인 의정활동을 보게 됐다”며 “'왜 이제야 이런 옥석들이 시의회에 오게 된 걸까'하는 생각을 한다"고 덧붙였다.

원 대표이사는 '여성 정치인'의 적극적 활동과 그에 맞는 사회적 풍토 조성을 다시금 강조했다.

그는 “저희 때 여성 시의원들은 유리천장을 뚫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상징적이었지만 그 후 저뿐 아니고 시의회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여성 정치인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는지 고민하게 된다”며 “성별의 문제로 접근하기보다는 30년 인천형 지방자치의 한계를 극복할 우리들의 숙제로 여겨야 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원미정 대표이사는 인천직할시 제1대 시의회에 후보로 나섰고, 이후 2·3대 시의원을 역임했다. 정치와 사회활동에 대한 수년의 휴면기를 거친 후 사회적협동조합 일터와 사람들을 설립해 경력단절 여성 및 청년층의 체계적인 취업지원에 나섰고 지난 2018년 9월부터 인천여성가족재단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이주영·김원진·이창욱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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