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19학생의거에 이어 1961년 5.16군사정변이라는 숨 가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1960년대를 연다. 이 두 사건은 광복 이후 계속된 경제 침체와 빈곤, 그리고 사회 전체에 만연한 부정부패에 대한 반동(反動)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격변으로 시작한 1960년대는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부여한 시기이기도 했음은 물론이다.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는 그 시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960년대 빈곤 탈피 고도성장 시동
인천항 물류 늘었지만 행정 못 미쳐
물류 무게 대신 덩어리로 재 바꿔치기
업자-직원 한 통속 인천항 밀수 성행
1963년 갑제호 조난사건 … 6명 사망
결빙 70㎝ 불구 무리한 운항에 참사
정원 초과·화물 만재… 전모 파악 못해
1949년 발생 '평해호 사고' 판박이
1962년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인천항 준설·매립 공사도 착수
1만t급 선박의 자유로운 입출항
연 1000만t 화물 처리 목표로 기공
연 2만명 노동자들에 반가운 소식
인천항 한미일 정기항로 처녀 취항식
미국행 스웨터 첫 수출 등 역사적 의미
제2도크 축조 1966년 첫 삽, 숙원 이뤄
1960년대는 만성적인 침체와 빈곤을 탈피하고 경제 자립을 이룩하기 위해 줄달음친 획기적인 전환의 연대였으며 경제의 확충과 각종 제도의 개선을 통해 지속적인 고도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개발의 연대였다.
인용문 중에 보이는 '줄달음친' '고도성장' 같은 말들이 1960년대, 70년대 우리 사회를 꼭 집어 상징하는 어휘였다. 이때부터 우리는 경제 건설의 아침을 열기 위해 줄달음침으로써 고도성장을 이룩했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초기의 인천항은 극명한 명암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에 들면서 항만의 설비 증설을 재촉할 만큼 인천항을 통해 입·출하되는 물자는 비약적으로 늘어나는 반면에, 그를 뒷받침해야 할 행정 관리 면은 거기에 전혀 못 미쳤던 것이다. 동아일보 1960년 8월30일자 기사 전문을 통해 그 실상을 살펴보자.
“시경에서는 지난 28일 홍콩을 왕래하면서 밀수입을 해온 전영화(全榮和, 35세, 용두동)를 구속하고 문초한 결과 4.19 이후 인천 항구는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공공연히 밀수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하였다는데 전(全)이 폭로한 바에 의하면 이들 밀수업자들은 과거 김포공항을 통해 비행기 편으로 하여 오던 밀수를 4.19 이후에는 전부 외국 기선을 통해 인천 항구로 대규모적인 밀수품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밀수업들이 갑자기 기선 편으로 밀수를 하게 된 동기는 각종 선박은 모든 물건을 '무게[量]'로 계산하지 않고 각개 덩어리로 따지기 때문에 얼마든지 물건을 '바꿔치기'를 할 수 있고(배에서 운반 통관할 때까지), 통관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그동안 관계 직원들과 적당히 교제할 수 있다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밀수 행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어디선가, 계속되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 동아일보 기사가 제목으로 쓴 '방비 없는 밀수 도시'라는 오명에는 기가 차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관계 직원들마저 '교제를 통해' 밀수범과 한통속이 되어, 그들로 하여금 '인천항을 자기 집 문턱 드나들 듯하게' 했었다는 데 이르러서야… 4.19 직후의 무질서와 더불어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던 부정부패이면서 인천항의 어두운 단면이었던 것이다.
더욱 암울한 모습은 1963년 2월, 6명의 부녀자가 사망에 이르러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천과 교동을 운항하는 연안여객선 갑제호(甲濟號)의 조난사건이었다.
이해 1월24일 인천항은 동장군의 엄습으로 개항 80년 만에 연안에서 약 3㎞ 해상까지 얼어붙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강의 얼음덩이까지 떠내려와 인천 앞바다의 결빙을 더욱 걷잡을 수 없게 했으니, 당일자 조선일보는 “하역작업이 성행하던 조기부두, 대인부두, 월미부두에 선박 출입이 불가능하며 다만 미군 예인선만 약간 움직일 뿐”이라며 인천항이 올 스톱했다는 보도를 낼 정도였다.
24일 인천항의 결빙 두께가 30cm였던 데 이어 26일에는 최고 두께가 무려 70cm에 이른다. 인천측후소는 2월20일경에나 정상적인 선박 운항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는 중에, 갑제호는 2월6일 무리하게 운항에 나섰다가 유빙에 부딪치면서 북도면 신도, 모도 앞 해상에서 조난했던 것이다.
이 사고에서 짚어볼 점은 갑제호가 정원을 초과하고 화물까지 만재했다는 점이다. 거기에다 관계 당국인 교통부 해운국이나 내무부 치안국이 조난 원인 등 사건 전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했다는 사실이다.
더욱 통탄할 일은 갑제호 사고가 1949년 10월8일 추석을 맞아 강화로 가던 똑딱선 평해호(平海號)가 정원을 초과해 무려 200명의 승객과 화물을 만재한 채, 작약도 남방 90m 지점에서 침몰해 21명의 사망자를 낸 사건을 거의 그대로 답습했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갑제호는 평해호 사고 당시 인근을 지나다 바다에 빠진 승객들을 구조했었는데, 14년 후에는 자신이 무고한 승객의 목숨을 잃게 한 것이다..
1953년 이래 인천항은 동양기선, 부천통운, 영종면통운, 황해기선, 삼양기선, 삼영기선 등의 선사가 당진, 목포, 교동, 덕적, 연평 등 13개 항로를 운항하는 서해 연안해운의 기점 항구였음에도 이 같은 사고를 일으켰던 것이다. 더구나 갑제호는 동양기선 소속으로, 이 회사는 제19화에서 소개한 인천 연안 해운업의 선구 유진식, 김종섭이 키운 삼신기선의 후신이었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무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사를 읽으며 문득 그때 이 사건을 취재하던 조선일보 기자 중 한 분, 후일 인천일보 회장을 지낸 유덕택(劉德澤) 선생의 심정은 어땠을까 싶은 것이다. 이 같은 사건들이 인천항의 어두운 그늘의 일단이었다면, 땀 흘리며 새롭게 시작하려는 건실한 움직임의 빛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우선 1962년 4월30일, 인천항에 대규모 준설공사와 매립공사의 기공이 그 실례였다.
이 공사의 골자는 1만t급 선박의 입출항을 목표로 연간 1000만t의 화물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이 공사를 통해 연간 8백만 달러의 외화 절약과 함께 동원될 노동인력만도 연인원 2만명으로 인천항 부근 노동자들에게는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1961년에 들어 인천항이 연간 하역능력 130만t을 회복하였다고는 하나, 1962년부터 산업화정책의 시발인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되면서 항만 확충이 더욱 절실했기 때문에 우선 이 같은 역사(役事)를 벌인 것이다.
한편 이 무렵 경인운하 건설 문제도 화제에 오르기는 한다. 1만t급 선박의 한강 통행을 목표로 하는 이 꿈은 후일로 미루어지지만, 당시 언론은 1~2년 뒤에 운하의 기초조사 정도는 이루어지리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또 한 가지는 인천항에 대기하던 대한해운공사 소속 7800t 남해호(南海號) 선상에서 인천항을 출발 기점으로 하는 '한·미·일간 정기항로 처녀취항식'이 1962년 8월6일에 거행된 사실이다. 이런 일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초라한 소식이기는 하지만, 9월21일에는 일본산 원사(原絲)를 가공하여 미국에 스웨터 완제품 175타(打)를 인천항을 통해 첫 수출했다는 기사도 보인다. 큰일은 큰 대로 초라한 일은 초라한 대로, 이것들이 다 인천항 역사에 기록될 일들이기는 한 것이다.
이 같은 1960년대 초의 엇갈린 명암 속을 지나며 1965년, 마침내 건설부는 12억원 예산으로 오랜 숙제였던 인천항 제2도크 축조 계획을 발표하고, 이듬해 1966년에 첫 삽을 뜨기에 이른다. 1960년대 초까지도 상당수 시민이 꿀꿀이죽으로 연명하던 암담한 삶에서 벗어나 인천항은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경제재건, 산업화의 길로 나아간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