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 온전한 우리 것 되는데 88년 세월 걸렸다

1883년 개항 이후 일본 제국주의 만행
1949년7월~1950년 6월만 우리가 주인

미군 광복·6·25전후 1971년까지 주둔
미 21항만사령부 → 인천 항만사령부 명칭
지금의 제물포부두 '찰리게이트'라 불려
영세 하역업체 … 1만여 노동자 임금체불도

인천항 1도크, 전쟁 만신창이 속 미군 관할
월미·대한제분·관용 등 주변 모든 부두
밀려드는 원조·구호물자 하역 업무 이용

북성동 소금 '염부두' 어선 '어련·화수부두'
조선 객주 중심 만석부두서는 양곡 하역
미군 원조 조기부두-시멘트·밀가루 대인부두
▲ 찰리부두(Charlie Pier) 전경. 6·25 발발 이듬해인 1951년부터 미군의 전용부두로 사용된 인천항 제물포부두의 잔교로 지금의 중부경찰서 앞쪽 일대에 있던 객선부두 옆이었다./사진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100년
▲ 찰리부두(Charlie Pier) 전경. 6·25 발발 이듬해인 1951년부터 미군의 전용부두로 사용된 인천항 제물포부두의 잔교로 지금의 중부경찰서 앞쪽 일대에 있던 객선부두 옆이었다./사진출처=사진으로 본 인천개항100년

인천항의 역사가 참으로 파란만장했음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이해가 될 것이다. 한마디로 인천항은 진정한 우리의 항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압제자의 것이었고, 주둔군의 것이었고, 그들의 관할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 인천항의 변화를 이야기하기 전에 잠시 그 역사를 살펴보자.

1883년 인천 개항 이후 인천항의 모든 것은 일본 제국주의 통치 아래 놓인다. 1945년 광복은 잠시나마 우리에게 희망을 주었으나, 이번에는 전승국으로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관할 아래 들어간다.

정부수립 후 1949년 6월말, 미군의 마지막 부대가 인천항을 떠나 철수하면서 마침내 우리 손에 돌아온다. 그러나 미군 철수 만 1년 후인 1950년 6·25한국전쟁이 발발함으로써 또 다시 인천항을 미군의 관할 아래 놓이게 한다.

그러니까 1883년 개항 이래 순수하게 우리의 주권이 인천항에 미쳤던 기간은 이 1949년 7월부터 1950년 6월까지, 불과 1년의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주인이었다고 할 수도 없는 전쟁 기간과 인천항 재수복까지 7개월여의 시간은 뺀 것이다.

▲ 월미도 부두. 북성동 대한제분 앞에서 월미도까지 놓인 석축 부두를 이른다. 지금의 인천내항7부두이다./사진출처=한국항만연수원 인천연수원 항만사진자료
▲ 월미도 부두. 북성동 대한제분 앞에서 월미도까지 놓인 석축 부두를 이른다. 지금의 인천내항7부두이다./사진출처=한국항만연수원 인천연수원 항만사진자료
▲ 북성동에 있던 인천항 염부두의 소금 하역장 풍경. 전쟁 후 인천 인근 지역에서 생필품을 싣고 들어오던 배들이 정박했었다./사진출처 =사진으로 본 인천개항100년
▲ 북성동에 있던 인천항 염부두의 소금 하역장 풍경. 전쟁 후 인천 인근 지역에서 생필품을 싣고 들어오던 배들이 정박했었다./사진출처 =사진으로 본 인천개항100년
▲ 북성동 경기도어업조합연합회 위판장(委販場) 건물이다. 어물을 싣고 온 배들이 위판장 옆의 부두에 집결해 흔히 어련부두로 불렀다. 지금의 인천내항 8부두 자리에 있었다./사진출처 =사진으로 본 인천개항100년
▲ 북성동 경기도어업조합연합회 위판장(委販場) 건물이다. 어물을 싣고 온 배들이 위판장 옆의 부두에 집결해 흔히 어련부두로 불렀다. 지금의 인천내항 8부두 자리에 있었다./사진출처 =사진으로 본 인천개항100년
▲ 만석부두의 곡물 하역 광경. 1960년대 원조 양곡의 하역을 주로 했다. 세간에서는 괭이부리, 조기부두 등도 통칭 만석동 부두라고 혼용하기도 했다. 조선 말경에는 이 일대에 객주를 설치했던 중심부두였다./사진출처 =사진으로 본 인천개항100년
▲ 만석부두의 곡물 하역 광경. 1960년대 원조 양곡의 하역을 주로 했다. 세간에서는 괭이부리, 조기부두 등도 통칭 만석동 부두라고 혼용하기도 했다. 조선 말경에는 이 일대에 객주를 설치했던 중심부두였다./사진출처 =사진으로 본 인천개항100년
▲ 조선기계제작소 일대 풍경. 일제강점기 철강업을 하던 이 공장은 태평양 전쟁 말기 소형잠수함을 제작하기도 했다. 공중에서 촬영한 이 사진에도 작은 도크가 보인다. 이 부두를 조기부두(朝機埠頭)라고 불렀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포격으로 인근에서 연기가 오르고 있다./사진출처 =치과원장 김식만 씨 블로그
▲ 조선기계제작소 일대 풍경. 일제강점기 철강업을 하던 이 공장은 태평양 전쟁 말기 소형잠수함을 제작하기도 했다. 공중에서 촬영한 이 사진에도 작은 도크가 보인다. 이 부두를 조기부두(朝機埠頭)라고 불렀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포격으로 인근에서 연기가 오르고 있다./사진출처 =치과원장 김식만 씨 블로그

그렇게 전쟁으로 재차 주둔한 미군이 1971년까지 머물렀으니, 인천항이 명실상부, 온전한 우리의 항만이 되기까지는 실로 88년의 장구한 세월이 흐른 것이다. 이토록 오랜 시간을 인천항은 남이 주인이었거나, 남의 관할을 받거나 하는 사나운 역사, 기구한 운명을 지녔었다.

6·25한국전쟁의 와중에 인천항에 주둔한 부대는 미 제21항만사령부였다. 미군은 애초 인천항을 제21항만으로 호칭했다. 주요 군수기지로서, 보급 항만으로서 인천항은 전쟁 직후 2년간 미8군 후방기지사령부에 소속되어 있다가 1955년 3월15일, 전방기지사령부로 소속이 바뀌면서 그 명칭도 인천항만사령부로 바뀐다.

인천항만사령부는 21항만사령부 자리인 월미도에 주둔하면서, 지금의 인천중부경찰서 위치에 있던 제물포부두, 곧 인천항 제1잔교를 군수물자 보급 전용부두로 징발해 사용한다. 당시 인천에서는 미군들이 사용하던 이 부두를, 그들이 작명(作名)해 부르던 대로 찰리 게이트(Charlie Gate), 혹은 찰리 파이어(Charlie Pire)로 지칭했다. 세관 쪽 부두는 조지 게이트(George Gate)였다. 항만사령부 월미부두(月尾埠頭)는 미군 항만사령부의 군수물자 물량장으로 현재의 인천항6부두쯤에 해당할 것이다. 항만사령부의 예인선, 수송선 등이 접안했다.

전후 인천항 부두노동자가 1만여 명에 이르고, 하역이 크게 활황처럼 보였던 것은 이 같은 미군 군수물자와 원조 물자의 입하 덕분이었지만, 당시 하역업자들이 영세했던 까닭에 실제 노동자들의 임금은 2∼3개월씩 체불되기가 일쑤였다.

전화(戰禍) 속에 만신창이가 된 인천항 제1도크는, 그나마도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미군의 관할이어서 전후 인천항에 밀려드는 원조물자, 구호물자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인천항 주변의 모든 부두들이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

그 중 하나인 월미부두, 혹은 월미도석제부두(月尾島石堤埠頭)로 불린 현재의 인천항7부두는 말 그대로 일제 강점기, 북성동 쪽 대한제분 앞의 육지와 월미도 간에 쌓은 연륙(連陸) 돌 축대를 이용한 부두였다. 외항에 정박한 배로부터 소형 선박으로 외자를 운반해 와 여기에서도 하역을 한 것이다. 인근의 대한제분부두(大韓製粉埠頭)도 역시 원조 물자와 곡물 등의 하역에 사용되었다. 관용부두(官用埠頭)는 옛 해운국 앞, 염부두 근처에 있었다. 항만청 등의 관용선이 이용하던 부두였다.

북성동 염부두(鹽埠頭)는 원래 수입 소금을 하역하던 부두였다. 일제 때부터 중국에서 수입하던 호염(胡鹽)을 주로 하역하던 부두였으나, 전쟁 직후에는 곡식이나 야채, 장작 같은 생필품들이 인근 지역에서 들어와 인천시민의 호구(糊口)를 도왔고 연료에 충당케 했다. 염부두에 대해서는 1930년대 인천항 칠통마당을 배경으로 한 현덕(玄德)의 소설 「남생이」에도 주인공 '노마'의 아버지가 소금가마를 져 나르다가 폐결핵에 걸려 자리에 눕는 이야기로도 등장한다.

북성동 어련부두(漁聯埠頭)와 화수부두는 어선부두로 주로 활용되었다. 1970년 내항으로 변하기 전, 어련부두는 근해에서 잡은 온갖 어물이 위판되는 곳이었다. 화수부두(花水埠頭)는 1950∼60년대, 조기 어획 철에는 중선 배들이 백 척이 넘게 몰려와 부두에 황금 조기를 내려놓던 대단한 부두였다. 지금은 매립과 인근의 공장에 둘러싸여 초라한 도시 내 포구로 전락했으나 한때는 인천의 주요 어항이었다.

▲ 1955년 3월17일자 마산일보 기사. 전쟁 직후 인천항의 관리가 2년간 미8군 후방기지사령부에 소속되어 있었다가 1955년 3월 15일, 전방기지사령부로 소속이 바뀌면서 그 명칭도 인천항만사령부로 바뀐다는 내용이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55년 3월17일자 마산일보 기사. 전쟁 직후 인천항의 관리가 2년간 미8군 후방기지사령부에 소속되어 있었다가 1955년 3월 15일, 전방기지사령부로 소속이 바뀌면서 그 명칭도 인천항만사령부로 바뀐다는 내용이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1957년 12월2일, 미국의 원조로 조기부두가 확장되면서 전쟁 후 제1도크 대용으로 쓰였다. 1959년 7월5일, 우리나라 최초의 실험용 원자로(原子爐)가 미국에서 도착한 뒤 부품 분해를 거쳐 이 조기부두에서 양륙되기도 했다./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
▲ 1957년 12월2일, 미국의 원조로 조기부두가 확장되면서 전쟁 후 제1도크 대용으로 쓰였다. 1959년 7월5일, 우리나라 최초의 실험용 원자로(原子爐)가 미국에서 도착한 뒤 부품 분해를 거쳐 이 조기부두에서 양륙되기도 했다./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

북성포구(北城浦口)는 과거 영종, 강화, 장봉 등 근처 섬에서 작은 어선이 출입하던 포구였고, 괭이부리는 작약도 통선 선착장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기부두(朝機埠頭)는 만석동 조선기계제작소 앞의 부두를 일컫는다. 일제가 태평양전쟁 말기 소형 잠수함을 생산하던 공장이어서 작은 선거(船渠)가 설치되어 있었다. 1957년 12월 2일, 미국의 원조로 확장하여 전쟁 후 주요 부두로 역할했다. 이 부두가 확장되면서 도크에 입거(入渠)하는 절차 없이 연간 70만 톤의 외자를 하역할 수 있었는데, 1959년 7월 5일, 우리나라 최초의 실험용 원자로(原子爐)가 미국에서 도착한 뒤 부품 분해를 거쳐 이 조기부두에서 양륙되기도 했다.

만석부두(萬石埠頭)는 조선시대부터 경강(京江)으로 통하는 요충으로, 세곡(稅穀)을 양륙해 보관하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양곡 만석(萬石)을 부려 놓을 만큼 광활한 배후지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지명이 붙었다고도 한다. 개항 직후인 1885년에 이미 선상회사(船商會社)의 하나인 태평회사(太平會社)가 만석부두에 자리를 잡았었다.

1886년에는 내선(內船), 곧 조선 상인들의 배는 외국 상선들과 섞이지 않게 만석부두를 통해서만 출입하도록 정부에서 내항으로 지정했지만, 외국 상인들과의 거래의 편리 때문에 점차 내선들이 제물포항 쪽으로 옮겨갔다. 1899년에는 객주를 설치하여 세금을 징수하던, 개항 이후 조선 객주들이 활동하던 역사적인 중심 부두였다.

이 만석부두 역시 전쟁 후, 양곡 등 수많은 외자가 입하, 하역되었다. 그 위치가 지금 남아 있는 만석부두와 꼭 일치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인근의 조기부두 위치 때문에 흔히 혼용해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날의 만석부두에서 북항 쪽으로 가다가 작은 만(灣)이 나오는데, 지도에서 보 면 꼭 장화(長靴)처럼 생긴 만 안쪽의 만석동 2번지 일대가 대인부두(大仁埠頭)였다. 1960년대 초중반 무렵까지 시멘트, 밀가루 등을 하역했다.

전쟁 후, 이처럼 인천항은 작은 배를 댈 수 있는 축대라면 어디에서든 하역이 이루어졌다. 제1도크를 사용하지 못한 채, 외항에 정박한 선박에서 화물을 실어와 여기저기 분산해 양륙을 했기 때문에 작업의 일관성, 효율성이 떨어져 체선(滯船)이 빈발해 비용발생이 컸던 데다가, 당국의 관리도 용이치 않았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제2선거가 축조되고, 후일 월미도, 소월미도를 이어 내항화 하기 전까지 대형 외자 선박들이 자주 인천항 입항을 기피했던 근본 원인이었다. 아마 인천항에서 밀수가 그처럼 극성을 부린 것도 이 같은 항구 여건이 그 한 원인이었을지 모른다.

어촌 제물포 포구에서 오늘날의 동양 최대의 거대한 인천 내항에 이르기까지 숱한 세월 동안 인천항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굴곡의 역사, 기구한 운명을 지닌 항구였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