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로 위 열차는 달라도 시민의 발 위상 그대로


1899년 9월 개통 땐 하루 2회 왕복하다
이듬해 3월엔 4회 왕복으로 운행 늘어
제물포로 자재 들어와 인천 기점 공사
경부선 개통에 경성으로 무게추 기울어
수도권전철 운행 계기로 수송량 급증
인구 분산돼 역세권·위성도시 만들어져
2005년엔 급행전철 전용선로 공사 마쳐
▲ 초창기 수도권전철 열차.

지난 회에 배은선 오류동역장은 경인철도 부설권을 두고 한국과 미국, 일본이 얽힌 관계와 초창기 경인철도 건설공사 사정을 상세히 다뤘다.

<인천일보 2021년 3월3일(수)자 15면 '인천에서 시작하는 철도이야기 2.경인선의 어제와 오늘 (상)'>

이번엔 왜 인천이 우리나라 철도의 시발지가 되었는지에 대해 당시 사회·경제·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알아보는 내용이 이어진다. 경인선이 점차 변화를 거듭하며 오늘날의 형태에 이르게 된 과정도 밝힌다.

▲하루 두 번 다니던 열차

1899년 9월18일, 인천에서 열린 경인철도 개업 예식에 대해서는 <독립신문>과 <황성신문(皇城新聞)>에 기록이 잘 남아 있다. 당시 운행됐던 최초의 동력차는 모가형 증기기관차였다. 미국의 브룩스(Brooks Lcomotive Works)라는 회사에서 만든 소형기관차다. '거물(巨物)'이라는 뜻의 'Mogul'을 '모가(モガ)'라고 부르는 이유는, 철도차량의 모델명을 가타카나 두 음절로 줄여 쓰는 것이 당시 일본의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경인철도는 네 대의 기관차 외에 12량의 객차와 4량의 합조차, 36량의 화차를 미국으로부터 수입했다.

당시 기차는 오전과 오후 하루 두 번씩만 다녔다. 곧 인천에서 오전 7시에 출발한 기차가 노량진역까지 오전 8시40분에 도착하고, 노량진역을 오전 9시에 출발한 기차는 인천역에 오전 10시40분에 도착했다. 오후에는 인천역을 1시에 출발한 기차가 노량진역에 오후 2시40분에 도착하고, 노량진역을 오후 3시에 출발한 기차는 인천역에 오후 4시40분에 도착하면 하루 운행이 끝났다. 그러다가 같은 해 12월1일부터 하루 두 번 왕복을 세 번 왕복으로 늘렸고, 이듬해인 1900년 3월16일부터는 1왕복이 더 늘어나 하루 네 번 왕복 운행을 하게 됐다.

 

▲철도는 왜 인천에서 시작했나

인천이 우리나라 철도의 시발지가 되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철도 건설 주요 자재와 차량 등이 모두 배편을 통해 제물포항으로 수입되었기 때문에 인천에서 공사를 시작하는 것이 당연했다.

실제로 경인철도 건설은 인천을 기점, 경성을 종점으로 삼아 설계에 따라 노반을 닦고 그 위에 궤도를 놓은 후 공사 진척에 따라 궤도를 연장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인천에 외국인을 위한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가 있었다는 사실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당시 해외에서 조선의 수도로 접근하는 방법은 제물포항을 통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그들은 인천의 조계를 중심으로 상업과 무역에 종사하며 필요에 따라 경성을 오갔다. 따라서 철도회사는 이들의 이동 편의를 우선순위에 두어 기차 시간을 짰다.

다음으로 인천에 차량을 정비하는 기지가 있었기 때문에 철도가 인천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인천공장'이라고 불린 이 기지에서는 부품으로 들어온 기관차나 객차, 화차를 조립하기도 하고 정비도 담당했다. 이렇게 인천은 설계상으로는 경인철도의 종착지였으나 초창기에는 시발지 역할을 수행했다.

▲ 2005년 12월21일 동인천역에서 열린 주안~인천 간 경인 2복선 개통식.
▲ 2005년 12월21일 동인천역에서 열린 주안~인천 간 경인 2복선 개통식.

▲경부철도 개통

경인선의 무게중심이 인천에서 경성으로 기울게 된 것은, 1900년의 경인철도 완전개통도 영향을 주었지만 1905년 1월 1일 이뤄진 경부철도 개통이 큰 계기가 됐다.

경부선을 통해 일본과 한반도가 직통으로 이어지고 인천의 조계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일본인들이 경성에 진출하여 아예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을사늑약과 경술국치 이후에는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경인선은 비록 짧은 구간이지만 이용객도 많고 화물수송도 매우 활발했다. 화물열차는 주로 쌀, 석탄, 공산품, 철도 용품 등을 실어 날랐다. 일제강점기의 경인선은 단위 거리당 여객과 화물 수송량 면에서 그 실적이 경부선과 경의선 등 다른 노선에 비해 월등히 우수했다. 그런데도 경인선이 복선(複線)으로 놓인 것은 비교적 늦은 1965년 9월18일의 일이다.

 

▲수도권의 번성과 맞물린 열차 발전

경인선이 가장 큰 변화를 맞게 된 계기는 뭐니 뭐니 해도 1974년 8월15일 개통된 수도권전철 운행이라고 할 수 있다. 1964년 7월 열차시간표를 살펴보면 평일 기준 정기 여객열차는 하행 20회, 상행 21회 운행했다.서울-인천 간 1시간10분이 소요되고 하행 첫차는 오전 5시20분, 막차는 오후 10시20분이었다. 매시 20분에 서울역을 출발했는데 다섯시와 여섯시 대에만 열차 2대가 있었다. 상행은 매시 45분에 인천역을 출발했는데 첫차는 오전 5시40분, 막차는 오후 9시45분이었다. 다섯시에서 여덟시 대까지 각각 2개 열차가 운행됐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수도권전철 개통 당시의 시간표를 분석해 보면, 경인선은 상·하행 각각 56회씩 운행됐고 시격은 20분이었다. 서울~인천 간 소요시간은 55분이었고 서울발 첫차는 오전 4시49분, 막차는 오후 10시39분이었다. 인천발 첫차는 오전 4시40분, 서울행 막차는 오후 10시20분이었다. 단순하게 열차 수를 비교하면 2.7배 늘어난 것으로 보이지만, 초창기 전동차가 6량 1편성이었다는 것을 고려해도 수송량은 최소 5배 이상 늘어났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전동차의 열차당 좌석 정원은 312명, 입석 624명, 합계 936명이며, 러시아워 때에는 2200명을 수송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수도권 전철은 편성량수를 초창기 6량에서 8량으로, 8량에서 다시 10량으로 늘려 수송력을 높였다. 시격 역시 20분에서 12분, 8분, 6분으로 계속 줄어들었다.

이렇게 전철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운행되면서 경인선 주변에는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서울로 몰리던 인구가 수도권으로 분산되면서 전철역을 중심으로 역세권과 위성도시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2005년 12월에는 구로~동인천 간 복복선 사업이 마무리되면서 일반전철과 급행전철이 별도의 전용선로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이제 경인선은 구로역에서 경부선과 나뉜 이후 온수역에서 서울지하철7호선과 만나며 소사역에서는 서해선과 접속된다. 부평에서는 인천도시철도1호선, 주안에서는 인천2호선과 접속된다. 주로 화물역 역할을 하던 인천역은 2016년 2월 수인선이 연장 개통되면서 환승역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120년 역사 경인선은 계속된다

2021년 현재 경인선 일반전동열차의 평균시격은 9.5분 정도다. 출퇴근 시간에는 평균보다 자주 다니고, 그렇지 않은 시간에는 좀 더 뜸하게 다닌다. 급행이나 특급 전동차가 정차하는 역의 경우 평균시격은 5.5분 정도다. 기술적으로는 열차를 조금 더 촘촘하게 넣을 수 있지만, 차량이나 인력 등 자원은 한정돼 있기 때문에 이용객이 계속 늘고 있는 경부선과의 균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역별 이용객을 보면 경인선은 정점을 지난 것으로 보이지만 수도권 서부 교통의 중심축의 기능은 그 어느 때보다 원활하게 수행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차가 출발한 지 12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경인선은 계속 성장 중이며 그 끝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배은선 기획전문위원·오류동역장

/정리=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사진제공=배은선 기획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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