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 전쟁 불안 지속…원조 선박은 부산 향했다

1949년 미군 철수 … 1950년 6·25 전쟁
인천 건물 44%·산업시설은 42% 파괴
부산항에 제1 무역항 넘겨주는 계기로
인천항 노조 노력 ECA 물자입항 수포

1950년 맥아더 인천상륙작전 성공
인천항 잠시나마 우방국 수입항 역할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 “인천 와있는
상당한 숫자” 원조쌀 등 입항 드러나

1951년 1·4 후퇴 한달여간 공산 치하
2월12일 태극기 … 13일 부산에 피난
인천항 부두 노동자 300여명 귀환

인천항만 시설 파괴·전쟁 불안 지속
우방국 원조선박 안전한 부산항 향해
▲ 덜레스(John Foster Dulles) 미국 대통령 고문이 극동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1950년 6월17일 입국한 뒤, 다음날 8시30분 동두천(東豆川) 방면 3·8선을 시찰하고 있다. 20일 그가 한국을 떠난 뒤 5일 만에 6·25전쟁이 일어난다. 가운데 모자를 쓴 작은 키의 인물이 신성모(申性模) 당시 국무총리 서리이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덜레스(John Foster Dulles) 미국 대통령 고문이 극동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1950년 6월17일 입국한 뒤, 다음날 8시30분 동두천(東豆川) 방면 3·8선을 시찰하고 있다. 20일 그가 한국을 떠난 뒤 5일 만에 6·25전쟁이 일어난다. 가운데 모자를 쓴 작은 키의 인물이 신성모(申性模) 당시 국무총리 서리이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덜레스(John Foster Dulles) 미국 대통령 고문이 극동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1950년 6월17일 입국한 뒤, 다음날 8시30분 동두천(東豆川) 방면 3·8선을 시찰하고 있다. 20일 그가 한국을 떠난 뒤 5일 만에 6·25전쟁이 일어난다. 가운데 모자를 쓴 작은 키의 인물이 신성모(申性模) 당시 국무총리 서리이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덜레스(John Foster Dulles) 미국 대통령 고문이 극동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1950년 6월17일 입국한 뒤, 다음날 8시30분 동두천(東豆川) 방면 3·8선을 시찰하고 있다. 20일 그가 한국을 떠난 뒤 5일 만에 6·25전쟁이 일어난다. 가운데 모자를 쓴 작은 키의 인물이 신성모(申性模) 당시 국무총리 서리이다./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군사 고문단 500명만을 남기고 미군의 마지막 부대가 인천항을 통해 철수한 것이 1949년 6월 28일. 그것은 곧, 일제의 패퇴 후 이어진 3년 가까운 미군정의 종식과 미군 주둔의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 이제부터 인천항을 우리 주권 아래 독자 운영하게 되는가 싶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공교롭게도 미군 철수 이후, 3일 모자란 만 1년 뒤, 1950년 6월 25일에 전쟁이 발발함으로써 인천항 도크에 제대로 손 한번 써볼 겨를도 없이, 또 다시 깊은 어둠 속에 빠져든 것이었다.

무릇 전쟁의 본모습이 그러한 것이지만, 총칼을 들고 눈에 핏발을 세운 싸움에서 피차 온전할 리가 없는 일이니, 그저 무참하고 혹독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천항에 남겨진 전쟁의 상흔은 형언키 어려운 비참한 것이었다.

▲ “3·8선 전역에 포격!”이라는 제하에 6·25한국전쟁 발발을 알리는 1950년 6월26일자 연합신문 기사. “국민은 냉정 침착하라” “국군 태세는 완벽” 문구도 보인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 “3·8선 전역에 포격!”이라는 제하에 6·25한국전쟁 발발을 알리는 1950년 6월26일자 연합신문 기사. “국민은 냉정 침착하라” “국군 태세는 완벽” 문구도 보인다./사진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DB

이밖에 시장, 창고, 사택, 공회당, 배수지, 해운단체, 국도, 항만시설 등 피해 상황도 매우 컸다. 6.25동란은 인천시민의 재산인 모든 공업시설들을 파괴시킨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항만시설의 기능 마비 등 재기하기 어려운 상처를 안겨 주었다.

인용한 글은 6·25전쟁 당시 인천시내 전반의 피해를 기록한 『인천상공회의소110년사』 내용의 일부분이다. 말 그대로 전쟁이 남긴 참혹한 피해를 기록하고 있다. 거기에 『인천광역시사』에 드러난 인천항은 또 다른 면에서 참담함을 느끼게 한다.

▲ 인천항에서 “쌀, 보리, 자동차 등 부흥 물자 속속 양륙 중”이라는 1950년 10월16일자 동아일보 기사.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원조 물자는 부산항에 입하됨으로써 인천항은 거의 빈사상태에 빠진다./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
▲ 인천항에서 “쌀, 보리, 자동차 등 부흥 물자 속속 양륙 중”이라는 1950년 10월16일자 동아일보 기사.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원조 물자는 부산항에 입하됨으로써 인천항은 거의 빈사상태에 빠진다./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

6·25전쟁은 우리나라 경제를 파탄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특히 경인공업지대가 위치해 있던 인천지역의 피해는 실로 엄청났다. 건물의 44%와 대규모 공장이나 주요 산업시설의 42%가 파괴되고 항만시설마저 파괴되어 대외무역 기능을 상실하는 등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또한 전란으로 인하여 중앙정부가 부산으로 이전하게 되고 수출입 물동량 또한 부산항에 집중됨으로써 국내 부산항에 제1의 무역항으로서의 지위를 넘겨주는 등 인천항의 역할과 기능은 크게 위축되었다.

1950년 인천항의 무역 규모를 살펴보면 수출 1000만환, 수입 1200만환을 기록하여 부산항의 수출입 규모에 비해 각각 5.2%와 31%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1951년부터 1953년까지는 수출과 수입 모두가 증가하였지만, 수출입 평균율로 볼 때 부산항의 규모에 비해 수출입 비중이 각각 6%와 4.7%로 오히려 인천항의 수입 비중이 더욱 크게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 1951년 2월12일, 1·4후퇴 후 2개월여 만에 재수복, 다시 인천시청에 태극기가 걸리자 “봄바람에 펄펄 평화는 깃들다”라고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
▲ 1951년 2월12일, 1·4후퇴 후 2개월여 만에 재수복, 다시 인천시청에 태극기가 걸리자 “봄바람에 펄펄 평화는 깃들다”라고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

특히 시사(市史)의 내용 중에 6·25전쟁이 인천항의 기능을 마비시켜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몰아넣음으로써 “부산항에 제1의 무역항으로서의 지위를 넘겨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구절에서 참담함을 느낀다는 말이다. 인천항은 암흑의 폐허가 되는데 부산항은….

문득 여기서 부질없이 생각은 뒤로 돌아간다. 전쟁 발발 일주일 전에 인천항자유노조의 노력으로 얻어낸 ECA 물자 입하는 어찌 되었을까. 6월 21일부터 27일 사이에 인천항에 입항키로 합의된 선박 7척과 거기에 실려 올, 3만8949t물자의 행방은 어떻게 되었을까.

인천항에 입항했었다 해도 만사휴의가 되고 말았겠지만, 일부 선박은 21일에서 24일 사이에 인천항에 들어왔을지 모른다. 25일에도 혹 어떤 배가 인천항을 향했을지 모른다. 그러다 전쟁 발발 연락을 받고 황급히 부산항으로 회항해 버렸을까. 기록이 남지 않아 이 따위 추측과 의문에 답할 길이 없지만, 분명한 것은 자유노조와 1만여 노동자들과 인천시민이 그처럼 고대하던 기쁨, 희망은 고작 며칠 만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두고두고 안타깝고 허망한 일이 아니던가.

물론 이 같은 감정적 표현은 실로 어리석고, 분별없는 망발이 될지 모른다. 모든 것이 폐허가 되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박한 생존의 갈림길에서 항구에 쌓인 물자를 생각한다는 것이….

그러나 6·25사변 2개월 20일이 되던 날인 1950년 9월15일, 맥아더(Douglas Mac Arthur) 장군에 의해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다. 그리고 공산 치하에서 벗어난 인천항은 잠시나마 UN과 우방국의 원조물자 수입항으로서의 모습을 띈다. 그때의 인천항을 동아일보가 전하고 있다.

▲ 1950년  9·15인천상륙작전에 이어 9월19일 인천항에 상륙하는 미 제7사단 병사들./사진출처=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 1950년 9·15인천상륙작전에 이어 9월19일 인천항에 상륙하는 미 제7사단 병사들./사진출처=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당시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었던 신성모(申性模)의 전재민(戰災民) 식량문제 대책 발언 중에 필리핀 등지에서 보낸 원조 쌀 등 “이미 인천에 와 있는 것만 하더라도 상당한 숫자에 달하고 있으며….” 운운하는 10월 11일자의 내용과, 백두진(白斗鎭) 임시외자관리청장의 “현재 인천항에 입항하고 있는 선박에는 이들 물자가 만재되어 있으나 양륙의 불편으로 자세한 물목과 수량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판명된 것은 쌀 3000t, 보리쌀 3000t, 수송용 자동차 400대, 기타 속속 양륙 중에 있는데 석탄은 계속 도착되고 있다.”는 16일자의 보도 등이 그것이다.

거기에 12월 23일자에는 피난민 소개를 위해 “인천을 비롯한 부산 간의 선박 순회 운영을 실시하고 있다.”는 김석관(金錫寬) 교통부장관의 언명에서도 전화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인천항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희망의 불씨가 살아나는가 싶었던 인천항은 1951년 1·4후퇴로 또 한 번 공산 치하에 들어간다. 그리고 한 달여 만인 2월 12일, 인천시청에 다시 태극기가 걸림으로써 재차 우리 손에 돌아오게 된다. 이어 그 이튿날인 2월 13일에는 부산에 피난해 대기 중이던 인천항 소속 부두노무자 300여 명까지 귀환한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는 「나 살던 내 부두로」라는 제하에 “인천의 완전 수복에 따라 동항(同港)으로 복귀하게 된 것이라는데 수송물자의 하선 양륙 작업을 위한 그들의 대량 복귀는 앞으로 인천항에 수송될 물량을 예상케 한다.”는 내용까지 곁들여 보도한다.

▲ 1952년 3월7일 인천항에서 유엔군 연료가 크레인에 의해 양륙되고 있다./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 1952년 3월7일 인천항에서 유엔군 연료가 크레인에 의해 양륙되고 있다./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이번에는 완전한 평화와 함께 한국 제1의 관문 항구로서 다시 한 번 인천항의 면목을 보이는 것일까. 하지만 동아일보의 “앞으로 인천항에 수송될 물량을 예상케 한다.”는 희망 부푼 추측 보도는 덧없이 빗나가고 만다. 인천항은 비참한 마비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길고 긴 전쟁이 원인이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3년간의 한국전쟁은 인천항을 접적지역(接敵地域)으로 낙인찍었기 때문이었다. 1952년 1월 1일에도 인천과 김포 상공에 공산군의 비행기가 출몰하는 상황이었으니, 이 일대는 여전한 전쟁지역이었다.

파괴된 인천항만 시설과 끝나지 않은 전쟁의 불안으로 해서 모든 ECA 외자선, 우방국 원조 선박의 뱃머리는 모조리 우리 정부가 피신해 있던 안전한 부산항을 향했던 것이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