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기생의 기백을 세상에 알린 이동근 학예사

단편적 신문기사 하나 보고 추적 시작
당시 '기생들의 만세운동' 사실 알게돼

나라의 연회 도맡던 조선기생과 달리
창기로 취급하던 일제의 치욕에 맞서
예인으로서의 민족적 의로움 보여줘
▲ 조선미인보감(1918)에 실린 김향화
▲ 조선미인보감(1918)에 실린 김향화

3.1절을 맞아 창작 가무극 향화에서 연기했던 뮤지컬 배우(상)와 처음 김향화의 삶을 발굴해낸 역사학자(하)가 본 김향화를 2편으로 나눠 항일운동가의 삶을 재조명해 봤다. 기생의 신분으로 항일운동에 나섰던 불꽃 여성 김향화의 삶을 다시 돌아봤다.

▲ 수원박물관 이동근 학예사가 김향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수원박물관 이동근 학예사가 김향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수원박물관 이동근 학예사

“아무도 김향화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정의할 수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일제의 총칼이 겨누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수원박물관 이동근 학예사는 김향화를 세상에 알린 장본인이다. 단편적인 신문기사 하나만을 가지고 추적, 발굴한 끝에 독립운동을 했던 김향화를 발견해 낼 수 있었다. 그는 1950년대 이후 종적을 감춰버린 김향화에 대해서 여전히 행방을 쫓고 있다.

“단편적인 신문기사 외에는 자료를 찾지 못했죠. 걱정이 앞섰지만 공부의 영역을 확장해 기생에 대한 자료들을 모으며 분석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1918년 발행된 조선미인보감을 발견했고 이 책에 실린 기생 33명이 만세운동을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김향화를 모티브로 각색한 다양한 뮤지컬, 연극에서 김향화는 진취적인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그녀가 실제 어떤 인물이었는지 어떻게 살아갔는지에 대해선 확언하기 힘들다는 것이 이동근 학예사의 의견이다.

“김향화란 인물에 대해선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자료를 바탕으로 당시 기생들의 당당했던 기상을 비춰 김향화도 진취적인 여성이었겠다는 추측이지요. 그들이 독립운동을 벌인 봉수당 앞은 수원경찰서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총칼을 들이대는 무시무시한 상황에서 독립만세를 외칠 수 있다는 것만 봐도 당시 기생들의 기상과 강인함이 엿보입니다. 이들을 이끈 이가 김향화였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여년이 흘렀고, 이젠 더 많은 사람들이 김향화를 기생의 이름보다 수원 지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 떠올리고 있다.

“김향화가 세상에 드러난 지 10년이 됐습니다. 오늘날 기생의 존재가 옛날이야기로 묻혀버렸지만 기생도 우리 민족의 일원이었으며 이 여성들의 재능은 대중예술이라는 장르로 계승되었고 당시 식민지 권력에 대항하며 보여주었던 수원기생들의 민족적 의로움은 오늘의 교훈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수원 기생 김향화는 환생해 우리들 가슴 속에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을 아로새겨주고 있습니다.”

▲ 수원기생의 성복참례(『매일신보』 1919.1.29)
▲ 수원기생의 성복참례(『매일신보』 1919.1.29)
▲ 1910년대 수원기생들이 만세부른 화성행궁 봉수당(자혜의원)
▲ 1910년대 수원기생들이 만세 부른 화성행궁 봉수당(자혜의원)

#이동근 학예사가 발굴해낸 김향화

이동근 학예사가 김향화에 흔적을 쫓아 밝힌 사료를 살펴보면 기생(妓生)이라 하면 천하디천한 것으로 여겨 대개 창기화 된 여성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왜곡된 이미지다. 본래 조선의 기생은 관기(官妓)로서 나라의 연회를 도맡던 존재였다. 교방이라는 것을 두고 춤과 노래, 기예나 시, 서화뿐 아니라 행동의 올바름까지 가르쳤다. 일제의 식민지배는 우리의 전통적인 기생의 모습에 변화를 가져왔다. 일제는 공창제(公娼制)를 강화하고 기생을 조합 형태로 편성해 식민지배의 통제 아래에 두었다. 천한 기생의 이미지는 이때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시대 기생에 수는 대략 3만 명에 달했는데 이들 중 김향화는 노래와 가곡뿐 아니라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에 능했고 검무와 승무, 궁중무용, 서양악기였던 양금까지 다루면서 수원 지역의 으뜸가는 기생으로 기록돼 있다.

▲ 김향화 표창장과 표창메달
▲ 김향화 표창장과 표창메달

김향화가 독립운동의 최전방에 나서게 된 것도 식민지배에 나라를 잃은 슬픔도 모자라 창기화하려했던 일제의 강압 때문이었다. 미모와 지성까지 갖췄던 황진이나 의로움을 갖춘 논개로 대표되는 의로운 기생의 상징을 일제는 무참히 무너뜨렸고 치욕을 견디지 못한 김향화를 비롯한 기생들이 독립 만세를 일제히 외치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김향화의 본명은 김순이로 1897년 한성부(서울)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 나이에 결혼 후 어떠한 이유였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혼을 하게 됐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기생이돼 수원 기생조합에 들어갔다고 한다. 22세가 되던 해 김향화는 수원 지역에서 제일 가는 예기로 성장했다.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돌아가시면서 나라를 잃었다는 슬픔에 수원예기조합 기생 33명은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고 망곡제(望哭祭)를 거행하기에 이르렀다.

고종황제 승하 후 일제의 식민 치하가 이어졌고 3월1일, 지역의 유지, 농민, 상인 노동자, 학생 등 누구 하나 가릴 거 없이 전국에서 동시 다발로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 여기에 수원 기생들 역시 김향화를 중심으로 만세 운동에 동참하며 화성행궁의 봉수당 앞에서 대학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당시 화성행궁 봉수당은 전통의 묵살을 명목으로 자혜의원을 세우고 기생들의 성병 검사를 시행하고 있었다. 1919년 3월29일 창기 취급하던 일제의 치욕스러운 위생 검사에 부당함과 불쾌함을 느낀 수원 지역의 기생들은 일제히 자혜의원 앞으로 모였고 일본 경찰과 수비대가 총칼을 겨누는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결국 김향화는 만세 운동을 벌인 주동자로 체포돼 2개월간 고문을 받았고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으로 넘겨져 공판에 회부된 뒤 그해 5월27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일설에 따르면 서대문형무소에서 유관순과 같이 수감됐다고 전해졌으며 10월27일 가출옥돼 수원으로 돌아온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한다. 수원시는 이동근 학예사가 연구한 수원 기생의 만세운동 자료를 바탕으로 2008년 국가보훈처에서 김향화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했고 정부는 2009년 김향화에게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사진제공=수원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