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론'의 중국중심주의를 전복하다'
▲ 혼천의(渾天儀). 선생은 1759년(영조 35) 나경적(羅景績)과 안처인(安處仁)에게 의뢰하여 3년간의 작업 끝에 혼천의(渾天儀)와 서양식 자명종[候鐘]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천문의기를 집 남쪽 마당에 호수를 파고 그 가운데에 정자를 지어 '농수각(籠水閣)'이라 명하고 그 안에 보관하였다. '농수'라는 명칭은 두보(杜甫)의 시 “해와 달은 조롱 속의 새요(日月籠中鳥) 하늘과 땅은 물 위의 마름이다(乾坤水上萍)”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혼천의'는 1만 원권 지폐 뒷면에 그려져 있다.

이후 선생은 실옹의 입을 빌려 지구의 자전에 대해 계란 노른자와 흰자, 그리고 회전하는 맷돌에 비유하여 '지구설'과 '지구자전설'을 편다. 또 '하늘에 가득한 별들도 세계이며 그 별들의 세계에서 보면 지구도 하나의 별'에 지나지 않는다고 '우주무한론'까지 설파한다. 선생은 또 이러한 자연과학사상으로 묫자리 문제까지 언급한다. 선생은 “대개 판판한 언덕과 높은 산은 모두 복된 땅이다. 무슨 풍화의 재앙이 있겠느냐?”며 땅의 길흉을 일소(一笑)해 버린다. 묫자리나 집터 등 풍수사상이 위력이 대단할 때이기에 선생의 주장이 꽤나 호기롭다. 하지만 '아! 조선, 실학을 독(讀)하다'의 갈 길은 멀고 지면은 좁으니 이만 생략하고 '화이론'으로 건너뛴다.

선생은 실옹의 입을 빌려 “하늘로부터 보면 어찌 안과 밖의 구별이 있겠느냐? 이러므로 각각 제 나라 사람을 친하게 여기고 제 임금을 높이고 제 나라를 지키고 제 풍속을 좋게 여기는 것은, 화(華)와 이(夷)가 한가지다”라 하였다. 화와 이가 다르다는 종래의 화이관(華夷觀)에서 탈피하여 이 둘을 동일선상에 놓았다. 즉 '화와 이는 하나'라는 '화이일야'(華夷一也)다. 선생은 이 '화이론'을 도가에서 말하는 기화론(氣化論)으로 설명하였을 뿐이다. 기화론은 신선사상과 도가사상을 원용이니 선생의 학문의 폭이 그야말로 거침없다.

 

중국과 오랑캐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은가?

실옹: 하늘이 내고 땅이 길러주는,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모두 이 사람이며, 여럿에 뛰어나 한 나라를 맡아 다스리는 자는 모두 이 임금이며, 문을 거듭 만들고 해자(垓字, 성을 지키기 위해 판 못)를 깊이 파서 강토를 조심하여 지키는 것은 다 같은 국가요, 장보(章甫,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이건 위모(委貌, 주나라 갓 이름)이건 문신(文身, 오랑캐의 별칭)이건 조제(雕題, 미개한 민족의 별칭)이건 간에 다 같은 자기들 습속이다. 하늘에서 본다면 어찌 안과 밖의 구별이 있겠느냐?

이러므로 각각 제 나라 사람을 친하고 제 임금을 높이며 제 나라를 지키고 제 풍속을 좋게 여기는 것은 중국이나 오랑캐가 한가지다.…공자가 바다에 떠서 구이(九夷)로 들어와 살았다면 중국법을 써서 구이의 풍속을 변화시키고 주나라 도를 역외(域外, 중국 밖)에 일으켰으리라. 그런즉 안과 밖이라는 구별과 높이고 물리치는 의리가 스스로 다른 역외춘추(域外春秋)에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성인 된 까닭이다.

이것이 선생이 주장한 역외춘추설이다. 이 또한 탁견이다. 중세적 지식과 관념은 사람과 사물, 천과 지, 화와 이를 위계적으로 바라보았다. 사람, 하늘,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요 기준이라는 것을 절대적 진리로 신봉하였다. 선생은 사람과 사물, 하늘과 땅, 성계(星界, 우주)와 지계(地界, 지구), 서양과 중국, 중국과 오랑캐 사이의 중심을 해체한다. 곧 이 세상에 절대적 중심은 없다는 말이다. 사람과 사물의 구획을 나누는 경우 사람이 보기에는 사람이 귀하고, 사물이 보기에는 사물이 귀하며, 하늘에서 보면 사람과 사물이 똑같다는 논리다. 누가 중심이 되느냐에 따라 서로 위계가 달라지는 것이니 중심은 맥락에 따라 이동할 뿐이다.

여기서 춘추대의(春秋大義, 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큰 의리), 존화양이(尊華攘夷,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침), 사대주의(事大主義, 큰 나라를 섬김)니 하는, 중국을 높이고 조선을 낮추는 당시 관념도 여지없이 해체한다. 선생은 '공자가 조선에 태어났으면 역외춘추를 쓰셨을 것'(自當有域外春秋)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 조선인이라는 자긍심으로써 중국을 사상적으로 극복해낸 말이다. '공자'라는 절대지존의 권위를 이용하여 이렇게 중국에 대한 공경을 전복해버렸다.

정인보(鄭寅普, 1893-1950년 납북)는 '담헌서서'(湛軒書序)에서 이 구절을 두고 “이른바 <의산문답>이란 것이 바로 이것이다”(所謂毉山問答者是也)라고 하였다. 필자 역시 정인보 선생과 의견이 다를 바 없다. <의산문답>의 핵은 바로 여기다.

선생은 당대를 살아가는 조선인으로서 '바른 마음'을 가졌기에 이러한 글을 썼다. <임하경륜>에는 이러한 선생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있다. '임하경륜'은 시골에서 원대한 나랏일을 설계한다는 뜻이다. <담헌서> 내집 권4, '보유'에 실려 있는데, 이 책에는 특히 경국제민을 위한 독창적인 개혁안이 제시되었다. 따라서 선생이 아래 글에서 말하는 장군의 길은 바로 지도자의 길이다. 나라이건 단체이건 지도자라 자칭하는 이들은 '그 마음이 바른지' 곰곰 되씹어볼 말이다.

장수가 되려면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 성색(聲色, 아름다운 소리와 색)이 그의 절개를 바꿀 수 없으며, 금백(金帛, 금과 비단)이 그 뜻을 움직일 수 없으며, 태산이 무너지고 하해가 넘친다 하더라도 그 안색이 변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사람을 쓸 수 있고 군사를 통솔할 수 있으며, 스스로를 지킬 수도 있고 적을 막을 수 있다.

대저 몸 하나로 삼군(三軍)의 무리를 거느림에 있어 일을 당해서 미혹하지 않고 싸움에 있어서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하게 여유가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마음이 바르기 때문이다.

다음 주부터는 취석실(醉石室) 우하영(禹夏永, 1741-1812) 선생의 <천일록>을 읽어본다. 우하영 선생은 수원(水原, 현재의 화성시 매송면 어천리) 출신의 농부 실학자이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