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왜란·민비 참살…의병 들불처럼 일어나다

갑오왜란, 1894년 일본군 육군소장 지휘
경복궁 쳐들어와 국왕 겁박 뒤 내각꾸려

흥선대원군, 동학농민군에 일본군 공격
지령 내리지만 신무기에 7만여명 학살

안동의병 서상철·평안남도 김원교 활약

일제 의한 왕비 참살·단발령 내려진 뒤
문석봉 '국수보복' 기치 첫 의병 일으켜
패퇴했지만 전국 각처 의병 '기폭제'로

김하락 이종사촌동생 조성학 등과 활동
광주·안성·양근 등서 포군 수백여명 모아
민승천 대장 …김하락 도지휘 의진 형성
▲ 왕비 민씨(뒤에 명성황후 추증)가 일본군경과 자객들에게 참살된 곤녕합.
▲ 왕비 민씨(뒤에 명성황후 추증)가 일본군경과 자객들에게 참살된 곤녕합.

◆ 갑오왜란 일어나다

1894년 7월23일(음력 6월21일) 일제는 일본군 육군 소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로 하여금 일본군 혼성여단 5000여 명을 지휘하여 조선의 궁성을 폭파하고 경복궁으로 쳐들어와서 국왕을 겁박하는 갑오왜란(갑오경장은 일본 입장)을 일으켰다.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는 그들 앞잡이들을 데리고 들어가서 내각을 꾸리게 한 후 장차 일으킬 청일전쟁에서 조선이 일본군을 지원하는 이른바 '조일동맹'이라는 비밀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제1조 : 이 맹약은 청국군을 조선국의 국경 밖으로 철퇴시켜 조선국의 독립과 자주를 공고히 하고, 조·일 양국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 일본국은 청국에 대한 공수(攻守)의 전쟁을 맡고, 조선국은 일본군의 진퇴와 그 양식 준비를 위하여 가능한 편의를 도모해 준다.

일제는 '청국이 조선을 침략할 경우, 일본이 조선을 돕기 위해 비밀리 동맹을 맺을 것'을 강요한 끝에 이루어진 것으로써 1개월 뒤에 “조선국 정부에서 청나라 군사를 철퇴시키려는 문제를 조선국 경성주재 일본국 특명전권공사에게 위탁하여 대신 힘써 주도록 약속한 이래”라는 가증스러운 내용을 첨가하여 마치 조선 정부의 '의뢰'에 의해 비밀조약이 체결된 것처럼 조작하였다. 조약체결일을 7월26일(양력 8월26일)로 하고, 일제앞잡이 외무대신 김윤식과 일본공사 오토리가 서명한 것이 1894년 7월22일 <조선왕조실록> 기사로 실려 있다.

▲ 일본왕에게 올린(上奏) 우치다 사다즈치(內田定槌, 주차조선일본영사관 일등영사) 보고서(이 문서는 일본왕에게 보고되었음을 의미한다).
▲ 일본왕에게 올린(上奏) 우치다 사다즈치(內田定槌, 주차조선일본영사관 일등영사) 보고서(이 문서는 일본왕에게 보고되었음을 의미한다).

 

◆ 갑오왜란에 반발, 의병 일어나다

일본공사는 그들 앞잡이 내각으로 하여금 '궁금령(宮禁令)'을 내리게 하여 모든 외부인의 궁궐 출입을 금하니, 국왕과 왕비는 궁궐에 포로가 된 상황이 되었는데, 흥선 대원군은 호남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에게 일제의 만행을 알리며,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도성으로 와서 일본군을 물리치라는 비밀 지령을 전했다. 이에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은 부랴부랴 농민군을 일으켰으나 관군을 상대로 싸웠던 1차 동학농민혁명 때와는 달리 기관총 등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농민군은 충청도 공주·홍주(현 홍성)·청주 등지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남쪽으로 쫓겨 마침내 수만 명이 학살당하는 사태가 생겨났다. 정부의 기록인 <순무선봉진등록>·<양호우선봉일기>, 황현의 <오하기문> 등에는 경남 하동, 전북 남원·운봉(현 남원 속읍), 전남 강진·광양·장흥·해남 등지에서 7만여 명이 학살되었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일제의 궁궐 침범과 일제앞잡이들의 언동에 반발하는 의병이 일어났는데, 대표적인 것이 안동의병과 상원의병이다. 그 가운데 일제침략기 의병의 효시로 알려진 것은 1894년 8월에 일어난 안동의병이다.

안동의병 기폭제 역할을 한 서상철(徐相轍)은 충남 공주에 거주하던 유생이었다. 서상철은 1894년 8월2일(음력 7월2일) 충북 제천의 선림(仙林)에 있는 한 주막에서 한인석(韓麟錫)·이경재(李 罄載)·한수동(韓守東) 등과 머물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궁궐을 침범해서 그들 앞잡이 내각을 내세운 만행을 저질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안동을 비롯한 영남 일대에 의병 궐기를 호소하는 '호서충의 서상철 포고문(湖西忠義徐相轍布告文)'을 발송하였다.

“… 지금 임금께서는 누란의 위기에 놓여 있는데, 안일하게 앉아서 돌아보지 않으며, 신하된 자로서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를 두고도 아무 각성 없이 다만 피할 줄만 알고 모두가 자기의 사사로운 일만을 꾀하여, 변란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으나 아직까지도 소문 한 번 내지 못하고 조용하기만 하니, 이것이 어찌 우리 열성조가 500년 동안 아름답게 길러온 의리라고 하겠습니까? 이 삼천리강토에서 관을 쓰고 허리띠를 두르고 사는 마을에 혈기를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단 말입니까?

… 이 격문이 도착하는 날, 8도에 충의가 있는 사람들은 이달 25일 일제히 안동부의 명륜당으로 오시어 적도를 토벌할 기일을 약속해 주시면 매우 다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권, '안동난민거괴 서상철의 격문 입수 송부')

격문의 요지는 일제가 군대를 동원하여 왕궁을 침범하고, 국왕을 위협하여 내각을 그들 앞잡이로 교체하는 갑오왜란을 일으켰으니 8월25일에 안동향교에 모여 적도(賊徒)인 일본군을 토벌하자는 것이었다.

이 격문은 통문 형식으로 안동·예안지역 유림의 대표격인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에게 도달된 것은 8월14일이었다. 향산은 30년 전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홍문관 수찬, 사헌부 사간·장령·지평, 양산군수, 공조참의 등을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을 내놓고 향리에서 제자를 기르던 유학자였다.

서상철이 예안향교를 찾아 향산을 만난 날은 그달 20일이었는데, 향산은 그의 주장은 옳지만 군사를 모집하는 것에는 다소 부정적이었다. 그는 안동 일대의 주요 인사들을 방문하고 동참을 호소하였으나 안동부의 방해로 8월25일 거사는 결국 실패하였다.

9월초 향산에게 국왕의 밀령이 전달되었다. 국왕은 비밀리 근친들을 삼남지방에 보내 의병 봉기를 촉구하였는데, 전 승지 이용호(李容鎬)가 국왕의 밀명을 받고 그를 찾은 것이었다.

이에 향산을 비롯한 예안, 안동 등지의 유림은 적극 참여하게 되니, 서상철은 2000여 명의 안동의병을 규합하고, 일본군의 병참부대가 있던 함창 태봉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9월24일 안동 근처로 정찰활동을 벌이던 다케우치(竹內) 대위를 체포하여 처단하고, 9월29일에는 토고(藤後) 소위가 인솔하는 공병대 25명과 태봉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의병 2명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다수 발생하였으며, 화승총 103정, 동전 9관문 등을 일본군에게 빼앗긴 후 청풍을 거쳐 경기 장호원 방면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895년 7월(음력), 평안남도 전 상원군수 김원교(金元喬)가 의병을 일으켜서 황해도 재령 장수산으로 진출하여 9월(음력) 중순까지 재령·봉산·덕천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정찰한 바에 의하면 상원의 적도(賊徒:의병-필자 주)들은 지난 10일 저녁 40명 남짓이 외국제 총을 휴대하고 군수 댁과 민가에 난입해서 무기·탄약·한전(韓錢) 등을 약탈했고, 나머지는 상원에서 동남으로 약 50리 되는 곳에 무리지어 모였음. 총인원은 약 600명 거괴(巨魁:의병장-필자 주)는 김원교(金元喬)로 전직 상원군수였던 자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7권, '평안도 상원군에서 발생한 폭도사건에 대한 조치 건' 3)

1895년 9월14일 일본군 병참감(兵站監) 타카이(高井)가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에게 보고한 전보에는 김원교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이 약 600명이라고 하였으니, 꽤 큰 규모였다.

▲ 1894년 6월21일(양력 7월23일) 일본군 혼성여단 5000여 명을 이끌고 경복궁을 쳐들어온 일본군 육군 소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원 표시). 그의 딸이 전 일본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할머니이다.
▲ 1894년 6월21일(양력 7월23일) 일본군 혼성여단 5000여 명을 이끌고 경복궁을 쳐들어온 일본군 육군 소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원 표시). 그의 딸이 전 일본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할머니이다.
▲ 청일전쟁 때의 일본군(그림).
▲ 청일전쟁 때의 일본군(그림).

 

◆ 을미왜란으로 전국에서 거의하다

본격적인 의병은 일제에 의해 왕비가 참살당하고 이어 단발령이 내리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전국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은 문석봉(文錫鳳)이었다. 그는 경북 현풍 출신으로 1895년 2월 공주부 영장에 있으면서 갑오왜란을 일으킨 일제를 몰아낼 것을 계획하고 영병(營兵) 400여 명을 훈련시키다가 피체되어 4개월의 옥고를 치른 바가 있었다. 그는 출옥 후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혼자 힘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고 경상도와 충청도를 다니면서 상주 좌영장 출신 최은동(崔殷東), 우국지사 김문주(金文柱)·오형덕(吳亨德)·노응규(盧應奎) 등과 교유하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9월18일(양력 11월4일), 충남 유성에서 '국수보복(國讐報復)'(나라의 원수를 갚자)을 기치로 거의하기에 이르렀으니, 왕비가 참살된 지 한 달 만이었다.

그는 선봉장에 김문주, 중군장에 오형덕, 향관에 송도순(宋道淳)으로 하는 유성의진을 편성하여 회덕으로 진군하니 따르는 의병이 1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는 회덕 관아의 무기고를 급습하여 의병들을 무장시켜 진잠을 거쳐 공주부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그는 병법에 능숙한 무과 출신이고 전투 지휘 경험이 많은 무장이었지만, 관군과 일본군으로 편성된 연합부대와의 전투에서 다수의 사상자를 낸 후 패퇴할 수밖에 없었으니, 거의한 지 1개월 만인 12월4일이었다.

문석봉의 거의는 을미왜란(을미사변, 부정확한 용어) 이후 '국수보복'의 기치로 의병을 일으킨 첫 사례로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단발령을 내리자 배달겨레는 전국에서 분연히 떨쳐 일어섰다.

▲ 김하락 의병장 초상화

◆ 김하락, 대규모 의병 일으키다

1895년 11월15일(양력 12월30일), 일제앞잡이 내각의 내부대신 유길준에 의해 강제로 삭발당한 국왕이 단발령을 내리자 경기 중·서부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그 중에도 광주·안성·여주·이천 지역의 의병이 가장 활발하였다.

김하락(金河洛)은 경북 의성 사람으로 한성(서울)에 왔다가 단발령이 내리자 의병을 일으키기로 다짐하고, 이종사촌동생 조성학(趙性學), 동지 구연영(具然英)·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과 더불어 이천에 도착하였다. 김하락은 친분이 있던 화포군(火砲軍) 도령장(都領將) 방춘식(方春植)과 상의하여 당시 예비군 성격이었던 포군(砲軍:산포수) 100여 명을 소집하고, 광주, 안성, 양근, 지평, 음죽 등지로 나가서 의병을 모집하기로 하였다.

조성학은 광주산성(廣州山城:남한산성)에 들어가서 별패진(別牌陣) 군관 김순삼(金順三)과 함께 포군 300여 명을 출동시켰으며, 구연영은 양근·지평에서 포군 300여 명을 모으고, 신용희는 음죽·죽산 지방에서 포군 300여 명을 모았는데, 또 자원 출전하는 포군도 100여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김태원은 안성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이미 민승천(閔承天)이 의병을 일으켜서 안성의진을 형성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얼마 후 김하락 일행이 모집한 의병과 민승천 의병이 합류하게 되니, 경기도 중·서부지역 의병들은 이천으로 모여 민승천을 대장, 김하락을 도지휘로 하는 대규모 의진을 형성하게 되었다.

▲ 이태룡 박사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