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한 싸움이었나…허망한 죽음에 애마도 우네

의병 밀조 가진 자 만나 순조롭게 모집
투쟁 성공 위해 의병장에 유인석 봉대
선봉장 돼 충주와 인근 지역 점령 앞장

가흥전투서 증원군 요청 묵살로 패배
의진 총괄 안승우에 거칠게 항의하자
유인석 “포수 불과한 상민” 처형 명령
억울하게 죽자 대오 와해돼 연전연패
천비마 무덤 맴돌다 죽자 곁에 묻어줘
▲ 김백선 의병장 무덤 아래 애마 ‘천비마’ 무덤(경기 양평군 청운면 갈운1리 산 125).
뒤쪽으로 김백선 의병장과 부인 파평 윤씨 어울무덤이 보인다.

◆ 호좌의진 선봉장이 되어

김백선과 이춘영은 강원도 원주와 경기도 지평을 돌면서 포군을 모집하러 다니다가 여주 방면으로부터 의병을 일으키라는 국왕의 밀조(密詔)를 가져온 자를 만났다. 특정 수취인이 없는 밀조였지만 이후부터는 의병 모집이 순조롭게 되어 다시 수백 명의 의병을 모을 수 있었고, 영월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던 안승우가 모집한 의병과 합친 것은 영월에서였다.

그들은 의병투쟁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권위 있는 지휘부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유인석을 찾아가서 의진을 맡아줄 것을 또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일제히 뜰 가운데 엎드린 채 울면서 간절히 청하자 마침내 유인석이 의병장에 올랐으니, 이날이 1896년 2월2일(음력 12월19일)이었다.

선봉장에 김백선, 중군장에 이춘영, 전군장(뒤에 중군장)에 안승우, 후군장에 신지수, 좌군장에 원규상(元圭常), 우군장에 안성해(安成海) 등으로 의진을 개편한 후 다시 의병봉기의 명분을 팔도에 알리니, 각처의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김백선과 이춘영이 모집한 포수 중심의 지평의병과 유인석·안승우를 따르던 유생 중심의 제천의병이 연합한 의병부대인 호좌의진(湖左義陣)이 비로소 탄생했던 것이다.

 

◆ 충주성 점령하다

제천에 본부를 둔 호좌의진은 불과 이틀 만에 충주 인근 고을을 장악한 가운데 의병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의병들이 붙잡아 구금하던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군수 서상기는 일제앞잡이 내각의 정령(政令)의 급속한 실행을 서둘러서 민중들로부터 원망을 받던 자들이었다. 유인석은 의진의 수뇌부를 모아놓고 이들의 처리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모았는데, 이들을 베지 않으면 인심이 풀어져서 의병으로서의 활동을 할 수 없다는 공론에 이르자 2월15일 유인석은 문루 위에 좌정하고 그들을 참형(斬刑)하여 본보기로 삼았다.

전열을 정비한 의진은 충주성 공략에 나서기로 했다. 충주부는 바뀐 지방제도에 따라 20개 군을 관할하는 관찰부였다. 각 군에서 시행되던 이른바 개화정책은 1차적으로 관찰부의 지시를 받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충주지역은 관군과 일본군이 많이 집결해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으므로 그곳을 장악하는 것이 전략상 매우 중요하였다. 당시 충주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은 단발령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2월16일, 충주성 점령을 위해 행군을 시작했다. 밤을 원서에서 보내고 이튿날 새벽 북창진에 도착하였다. 의병들이 얼음을 타고 강을 건너 충주성으로 몰려들었다. 의병들의 대공세를 미리 알지 못했던 성중에서는 당황하여 성을 지키던 관군과 일본군은 허둥지둥 전열을 가다듬지 못했다. 김백선은 포수로 구성된 선봉부대를 지휘하여 동문을 넘어 들어가서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치고 성문을 열었으므로 충주성을 점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충주관찰사 김규식은 의병들의 손에 붙잡혔다. 유인석은 그가 '왜적의 앞잡이가 되어 반역하고 단발령 시행의 행패를 부린 죄상'을 밝히고 북문 밖에 효수하여 본보기가 되도록 하였다.

 

◆ 충주성에서 격전 치르고

호좌의진은 충주성에 입성한 다음날부터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특히 충주에서 멀지 않은 수안보와 가흥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응원군으로 몰려왔다.

2월23일, 일본군 수백 명이 달천까지 들어왔다는 급보를 받은 중군장 이춘영은 의병들을 거느리고 나가서 싸우다 적탄이 얼굴에 명중하여 장렬하게 전사하니, 그의 나이 28세였다.

2월29일, 관군과 일본군이 충주성 밑에 육박하게 되자, 대장소에 있던 주용규(朱庸奎)는 창을 들고 남문 문루로 올라가서 싸움을 독려하다가 적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밤낮으로 악전고투의 상태로 5, 6일을 지나는 동안 전사자와 부상자가 많이 생기고, 바깥에서 오는 구원의 손길이 끊겨 나무와 양식마저 모자라서 말을 잡아먹고, 집을 뜯어 불을 때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3월5일, 마침내 의진에서는 충주성 동문을 빠져나와 청풍으로 들어갔는데, 이때의 상황을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았다.

“충주부는 2월 17일 이래 폭도(暴徒:의병-필자 주)들이 차지하였으며, 그곳의 험요(險要)함에 의지하여 정예를 모아 사수하고 있었다. 우리 수비대가 몇 차례에 걸쳐 이를 공격하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쉽게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3월 5일에 이르러 우리 수비대 3개 중대가 힘을 합하여 포위 공격한 결과 이를 함락시켰다.”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3개 중대의 공격으로 호좌의진은 충주성을 포기하고 청풍으로 나와 진중을 수습하니 일부 흩어진 군사들이 모여들어 성세가 다시 떨치게 되었으며, 3월8일에는 제천으로 들어와서 유진하였다.

 

◆ 가흥전투와 김백선의 처형

3월16일, 의진에서는 선봉장 김백선을 중심으로 후군과 좌·우군이 합세하여 가흥(현 경북 영주시) 방면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총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일본군의 세력이 예상보다 우세하므로 김백선은 증원군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본진에서 의진을 총괄하던 중군장 안승우는 그 요청을 묵살하고 응원군을 보내지 않아 전투에서 패하고 회군한 김백선은 술을 마시고 대장소를 찾아 안승우에게 거칠게 항의하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인석은 엄숙하게 말한다.

“선봉이 취했는가? 무슨 망령인고? 내가 술에 너무 빠지지 말라고 하였거늘, 왜 말을 듣지 아니하는고?”

하니, 김백선은 칼을 던지고 땅에 엎드리므로 유인석은 좌우에 명령하여 묶게 한 후 호통을 쳤다.

“그대는 본시 포수에 불과한 상민이었거늘, 동비(東匪)를 척살하여 절충장군 첩지를 받았다고 어찌 분수를 모르는가? 여봐라! 저 자를 군령위반죄로 다스려서 목을 베렷다!”

포수들을 이끌고 충주성을 점령했던 의진의 선봉장 김백선은 수많은 동료 의병들이 모인 가운데 공개 처형되고 말았으니, 이날이 1896년 3월27일이었다.

 

◆ 김백선 의병장을 기리다

김백선은 불량한 무리들이 동학을 빙자하여 약탈을 자행할 때 이를 소탕한 공적으로 절충장군(정3품)의 첩지를 받았다. 포수 출신으로서 엄청난 신분 상승이었고, 그로 인해 상민 출신으로서 유일하게 호좌의진 지휘부에 참여했던 인물이었으니, 그는 포수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다. 나이로 보면 유인석보다 일곱 살이 적었지만, 안승우보다 열여섯 살이 많았다.

김백선의 처형에 대하여 송상도(宋相燾)는 <기려수필>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적병이 앞에 있고 우리는 약하고 적은 강하니 비록 보통 군사라도 될 수 있는 대로 규합하여 세력을 확장하여야 할 터인데, 더구나 호걸스럽기 김백선 같고 용맹하기 백선 같은 사람이랴? 그의 죄라는 것이 일시 분을 참지 못한 것뿐인데 개과천선하도록 할 것을 생각지 않고 어찌도 그렇게 아낌없이 죽이고 말 것이랴! 그 중에는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니 병권이 빼앗길 것을 시기함인가? 평민에게 욕본 것을 분하게 여겨서인가?

원래 의거라는 것은 적을 토벌하기 위해서이다. 가흥 싸움에 백선이 안승우에게 구원을 청하였는데, 승우가 군사를 보내지 않아서 백선이 패배하고 의병들도 사기가 꺾이게 되었으니, 그의 분노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대의를 내세워 원수를 갚으려 하는 자가 적은 토벌하지 않고 먼저 장수를 죽여서 그 방패를 버리고 성을 무너뜨리니 제천의 패전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김백선의 처형은 의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가 총살되자 그를 따르던 지평의 포수들은 물론, 인근 지역에서 참여했던 포수들마저 하룻밤 사이에 의병 대열에서 이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포수들이 빠져나간 호좌의진은 연전연패를 거듭하게 되었다. 포수들은 이른바 '산포계(山砲契)'를 중심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조직력도 대단했고, 화승총에 비해 성능이 월등한 엽총을 가지고 있었기에 의진의 전투력 측면에서는 절대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김백선의 시신은 제천에서 지평으로 운구되어 일가친척과 포수들의 통곡 속에 장례를 치렀다. 며칠 후 그가 타고 다니던 애마 '천비마(千飛馬)'가 먼 길을 용케 찾아와서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김 의병장의 무덤 곁을 맴돌다 스러지니, 무척 애달프게 여겨 김 의병장의 무덤 아래에 묻어주고, 묘비를 세워 기렸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