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도시 인천, 판소리 세계화에 적격”

9살 때 우연히 심청가 접하고 소리에 꽂혀
부모님 반대 무릅쓰고 독학하다 가출도 감행
목포국악원 들어가 각종 상 휩쓸고 소리꾼 데뷔
'87년 전주대사습놀이 대통령상으로 명창 반열에

인사동서 후학 키우다 2010년 인연으로 인천에 새 둥지
길거리 버스킹 및 청소년·외국인 강습으로 우리 소리 전파

옛날엔 여자가 판소리를 하면 기생이 된다고 했다. 늙은 양반 첩으로 살게 될 거라고도 했다.

1941년 목포에서 태어난 박계향 판소리 명창은 9살이 되던 해 우연히 심청가를 듣고 소리에 빠졌다.

“기생 되고 싶냐”는 아버지의 거센 반대 때문에 그는 동네 있던 국악원 마루 지하로 숨어들기 일쑤였다. 위층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가사를 받아 적어 속으로 따라 불렀다. 방안에서 사람들이 걸어다닐 때면 풀풀 먼지가 떨어졌다.

이렇게 판소리에 70년 인생을 바친 그가 현재 인천에서 터를 잡고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는 최근 판소리계 가장 큰 상인 동리대상을 수상하며 또 한 번 명창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좋아서 견딜 수 없었던 소리

“우연히 임방울 협률 단체 공연 춘향전을 봤어요. 그 소리가 너무 좋은거야. 자다가도 생각나고 매일 매일 생각나. 나도 저걸 불러야지, 춘향이가 되야지 했지요.”

하지만 부모님이 그를 막아섰다. 그 어린 나이에 몰래 공부를 시작한 그는 춘향가 초입부터 농부가까지 혼자 익히며 소리꾼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학교 음악시간에 친구들은 동요를 불렀지만 그는 혼자 판소리를 불렀다.

“아버지가 집 살 돈을 서랍에 넣는 걸 보고 절반을 훔쳐 유명한 선생님이 있다는 보성으로 달아났어요. 그게 16살 때였죠.”

7개월간 판소리를 실컷 부르고 배우며 꽃길을 걷고 있을 때 경찰이 그를 잡으러 왔다. 아버지가 실종 신고를 낸 것이었다. 이후 집에 3개월간 갇혀있다가 크게 앓은 적이 있었고 그 모습을 본 부모님이 결국 포기를 하셨다.

곧장 목포국악원에 들어간 그의 판소리 인생이 시작됐다.

소녀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며 당시 유행했던 강강술래 선소리는 물론, 각 동네 행사와 경연 대회마다 불려 다니며 1등 상을 휩쓸었다. 춘향가, 심청가 전 바탕을 익혀, 그해 겨울부터 연극 무대에 서며 정식 소리꾼이 됐다.

하지만 이번엔 아버지가 아니라 남편이 그녀를 또 한 번 막아서기도 했다.

“결혼하고 아기까지 낳은 여자가 무슨 판소리냐고 반대를 했어요. 바구니 들고 시장가는 척 하며 또 몰래 배우고 또 몰래 노래하고 그렇게 살았죠.”

▲ 박계향 명창이 국립극장 초청 발표회에서 판소리 공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제공=박계향 명창
▲ 박계향 명창이 국립극장 초청 발표회에서 판소리 공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제공=박계향 명창

#대한민국 판소리 명창으로 우뚝

그의 소리를 한 번 듣고 나면 누구든지 판소리의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는 가사전달력이 뛰어나고, 특히 깨끗하고 청아한 고음 부분이 두드러진다. 1987년 전주대사습놀이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창 반열에 올랐다.

“판소리에는 인생이 다 녹아 있어요. 그 가사를 들어보세요. 아이들에게도 매우 교육적이죠.”

스스로 판소리 속 인물이 되고야 마는 그는 공연 때마다 많이 운다고 했다.

“내가 그 사람이 되니까 애통하고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관객들도 더욱 큰 감동을 받고요.”

박계향 명창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은 후학 양성이다. 판소리가 명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또 많은 이들이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이끌어주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는 42세가 되던 해부터 약 20년 동안 종로구 인사동에 판소리 학원을 열어 후학 지도에 최선을 다했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명창의 꿈을 꾸는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었다.

“여러 상을 휩쓸었으니까 신문·방송들도 관심을 많이 가져주셨어요. 하지만 방송이나 특정 이벤트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공연보다는 우리 국악을 알려야 하는 장소와 사람들을 찾아다녔죠. 길거리에서도 공연을 하고 강연을 하며 한번만 소리를 들어보라고 호소했어요.”

박 명창은 판소리가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다는 젊은층에게도 자신 있다고 자부했다.

“우리 판소리는 일단 빠지게 되면 그 중독성이 가요나 클래식 등 다른 장르에 예술을 능가해요. 노랫말 뜻조차 모르는 외국인들이 판소리의 매력에 빠져 판소리를 배우겠다고 만리타향 대한민국에 와서 판소리를 배운다는 게 그 사실을 입증하죠.”

#남은 인생은 인천에서

서울과 부산 등을 다니며 활약하던 그가 처음 인천과 인연을 맺은 건 2010년 이었다.

“후배가 인천에서 행사가 있다고 부탁을 하더라고. 그래서 판소리 독창 공연을 했죠.”

당시 전용철 시의원이 이 공연을 보고는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시의원이 인천은 판소리 불모지니 부디 좋은 이 소리를 전파시켜 달라고 간곡히 청을 했어요. 그래서 여기 사무실을 얻어 오게 됐습니다.”

그가 본 인천은 정말 판소리와 무관한 도시였다. 경기민요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소리의 본고장은 전라도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나라 두 번째 대도시인 인천은 너무나 척박했어요.”

연구소와 거처를 인천에서 마련한 이후 지금까지 그는 인천에서 판소리 알리기와 후학 양성에 온 몸을 바치기로 다짐을 했다. 또 인천무형문화재 등록을 위해서도 애쓰고 있다.

“인천은 국제도시잖아요. 판소리의 국제화·세계화를 이루기에 알맞은 여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정례화된 공연장과 길거리 버스킹 공연, 그리고 학교 등 찾아가는 공연 등을 통해 청소년과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판소리 감상회와 강습을 열어 우리 판소리 문화에 담긴 인간 보편성을 서로 주고받고 싶어요. 동시에 판소리의 우수성을 전달하고 송도에 위치한 다양한 연령대의 국제학교 교육과 연계해 판소리 문화를 한 번이라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게 제 목표입니다."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