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 공작창.

 

초등학교 6년 내내 높고 기다란 공장 담을 따라 등하교했다. 한눈 팔 게 거의 없어 오가는 길이 지루했지만 겨울철 매서운 바람을 막아주는 따듯한 양지바른 길이었다. 간헐적으로 망치 소리가 담 넘어 들렸던 그 공장은 동구 화수동의 '인천공작창(工作廠)'이다. 언뜻 찰흙이나 수수깡으로 만드는 공작 시간이 떠오르지만 그곳은 기차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인천공작창의 시작은 1899년 이 땅에 최초로 미국에서 들여온 모갈형 기관차와 화차의 조립이었다. 1908년 용산공장에 합병되었다가 1937년 일본차량주식회사 인천공장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6•25전쟁 중인 1950년 10월 인천공작창으로 재발족한 후 조립과 수리를 넘어 제조까지 했다.

가끔 공작창 안으로 이어진 철길로 고장 난 기차가 끌려가거나 번쩍번쩍한 신차가 나오는 장면이 기억난다.

기록에 의하면 1955년 대통령 전용 객차를 만들었고 1963년 국내 순수 기술로 석탄화차 10량을 제조했다. 비둘기호•통일호 객차를 비롯해 수화물 우편차, 식당차, 침대차, 군병원객차 등을 만들었다. 그 중에는 1965년 생산한 수인선 협궤객차 6량과 1969년의 협궤객차 12량도 포함돼 있다. 인천공작창은 1983년 대전정비창에 흡수 통합되어 폐창되었다.

협궤열차는 이후 더 이상 만들어진 기록이 없으며 현재 5량이 남아 있다. 2량은 의왕시 철도박물관에 있고 3량은 목인박물관 김의광 관장이 1996년 한국철도공사로부터 사들인 뒤 충북 진천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그 중 '차량번호 18028' 객차를 인천시립박물관이 기증받았다. 유일하게 '인천공작창' 라벨이 붙어 있는 인천 화수동 산(産) 객차다. 현재 전문업체에서 보존처리 작업 중이며 오는 11월 인천시립박물관의 우현마당 양지바른 곳에 전시될 예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객차에 한눈 팔 게 틀림없다.

/인천시립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