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굴업도 농활 숙소에 놀러온 섬 아이들 (1978년).

 

1978, 79년 여름 이태 동안 농활을 다녀왔다. 당시에 듣도 보도 못했던 굴업도였다. 이 섬이 세인에게 알려진 것은 95년 핵폐기장 사건 이후부터다.

농활단은 서울 사람이 지은 큰말 해변가에 있는 작은 별장(단층 양옥)을 빌려 열흘간 묵었다. 우리는 온종일 땅콩밭의 김을 맸다. 주민들은 대학생들이 그저 섬에 와주는 것만도 감사하다고 했다. 그만큼 사람이 그리운 섬이었다.

서른 명 남짓 살고 있던 그 섬에 작은 분교가 있었다. 부부 교사와 초등학생 8명이 재학 중이었다. 아이들의 외로움은 어른 못지않았다. 처음에는 멀찍이 떨어져 우리 일행을 바라만 보더니 하루 이틀 후 숙소를 기웃거렸다.

작은 섬 안에는 놀거리가 거의 없었다. 본섬에 딸린 토끼섬에서 뛰어노는 것도 지겨운 일이었다. 그들의 유일한 오락은 탁구였다. 빈 교실에 낡은 탁구대가 있었다. 어느 날 아이들과 함께 탁구 시합을 했다. 탁구깨나 친다는 우리 친구들이 연전연패했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자세로 서브를 했고 정확히 모서리(에지)에 공을 찔러 넣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은 자기들끼리 터득한 고난도 기술이었다.

일 년 후 전교생이 인천에 나왔다. 부천의 시온고등학교에서 열린 경기도 탁구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응원도구를 준비해서 대회장으로 갔다. 멋진 유니폼을 입은 육지의 '선수'들이 섬 아이들에게 맥없이 패했다. 생판 처음 보는 기술에 심히 당황할 뿐이었다. 굴업도 분교가 준우승을 했다.

학생 수가 줄어 폐교 위기에 놓인 덕적도의 덕적고교가 궁여지책으로 야구부 창단을 논의하고 나섰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굴업도의 '선수'들이 생각났다. 문득 청정 그 자체였던 굴업도의 물과 바람이 그립다. 굴업도 '아이들'이 스스로 터득한 기술로 세파를 헤치며 잘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유동현 인천시립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