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변고 있을 때마다 의군을 일으키다


박은식 기록에 따르면 경기 양근 출신
매천야록·판결문 통해 1877년생 추산
40여 차례 교전서 일본군 470명 살해
1909년 3월31일 피체돼 6월16일 순국

1895년 을미왜란 이듬해 김산의진 참여
1905년 을사조약에 반발…강원 홍천서 궐기
1907년 광무황제 강제퇴위에 본격적 투쟁 개시
이인영 관동창의대장 추대…강대한 진용 형성
▲ 김산의진 거의를 논의했던 김산향교. (경북 김천시 김산향교1길 2-19)

 

▲ 이은찬 의병장, 교형이 선고되다. (경성지방재판소. 1909. 5. 8.)
▲ 이은찬 의병장, 교형이 선고되다. (경성지방재판소. 1909. 5. 8.)

 

 

◆ 13도창의대진 견인차 역할하다

이은찬(李殷 )(1877~1909) 의병장은 전기의병 때인 1896년 3월 김천·성주 등지에서 이기찬(李起燦)·조동석(趙東奭)·허위(許蔿)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킨 바 있고, 후기의병 때는 이인영(李麟榮) 의병장을 관동창의대장에 이어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 의병대장에 추대하여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할 때 13도창의대진소 원수부(元帥府) 중군(中軍)으로 활약했으며, 서울진공이 무산된 후 의진을 재편, 창의원수부(倡義元帥府) 중군으로 포천·양주 지역과 임진강 유역에서 맹활약하다가 1909년 3월31일 경성부 용산역에서 피체되어 그 해 5월8일 경성지방재판소(경성지방법원 전신)에서 교형이 선고되었다.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국가보훈처, 1986)에는 “1909년 5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오류이다.

“판결 융희 3년 형(刑) 제279호

강원도 원주군 부흥사면(富興寺面) 신성리(薪城里) 유생 이은찬(李殷瓚) 32세

상기자에게 대한 내란죄 사건에 대하여 검사 이토 도쿠준(伊藤德順)이 입회하고 심리 판결함이 다음과 같다.

주문

피고 이은찬을 교(絞)에 처한다.

이유

피고는 광무 11년 음력 7월경 당시에 정변으로 변혁된 정부의 새 정사(政事)에 불만을 품고서 이를 변경할 목적으로 스스로 '의병을 모집한다'하여 도당(徒黨)을 소집하고 융희 3년 3월 31일 체포되기까지 계속하여 수십 명 내지 수천 명의 적도(賊徒)를 이끌고서 무장하고 경상·황해·충청·경기의 각도를 횡행하며, 혹은 군수(軍需)라 하여 백성의 재물을 겁략하고 혹은 수비대와 교전하는 등 항상 관헌에게 반항하여 국가의 안녕 질서를 문란하게 한 자이다.

이상의 사실은 피고의 공술, 피고에게 대한 제1회에서 제5회 청취서에 의하여 이를 인정한다.

피고의 소위는 형법대전 제195조에 해당하므로, 동 조목의 율에 의하여 처단함이 가할 것이다.”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권. 254~255쪽)

황현은 이은찬 의병장의 수감 사실과 그가 재판정에서 일본군 470명을 처단했다고 당당하게 말한 것에 대하여 찬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의병장 이은찬이 경성감옥에 수감되었는데, 그의 나이는 33세이다. 그는 강개하고 격렬하여 그를 보는 사람들은 모두 칭송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크고 작은 싸움을 40여 차례나 하였으며, 일병을 470명이나 살해하였다고 한다.” (황현, <매천야록> 권6 융희 3년 4월조)

그는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형이 선고되었는데, 2심 재판소인 경성공소원(경성복심법원 전신)에 공소하지 않아 형이 확정되어 1909년 6월16일 교형이 집행되기에 이르렀다.

대한매일신보에는 '義將歸天(의장귀천)'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었다.

“의병대장 리은찬시 작일(昨日) 오후 1시에 경성감옥에서 사형을 집행 하얏다더라.” (대한매일신보. 1909년 6월17일)

이은찬 의병장은 일명 은찬(殷贊)·언찬(諺瓚)·헌찬(憲瓚)으로 불렸으며 조선 제2대 국왕 정종의 열 번째 왕자였던 덕천군(德泉君)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에는 강원도 원주군 부흥사면(현 원주시 판부면)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경기도 양근(楊根:1914년 지평과 합쳐 양평군) 출신으로 기록하였다. 판결문에 기재된 주소는 강원도 원주군 부흥사면 신성리로 되어 있다.

출생년도에 대해서도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과 <기려수필>에는 1878년으로 기록하고 있고, <매천야록>에서는 그가 경성감옥에 수감되었던 1909년 33세였다고 하였으며, 판결문에는 32세라고 기재되어 있다. <매천야록>에는 한국식 나이를, 판결문은 일본식 나이를 말하고 있기에 1877년으로 하였다.

순국일은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에는 <기려수필>에 따라 1909년 6월27일 순국하였다고 하였으나 대한매일신보와 관보에 따라 6월16일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 이은찬 교수형 집행 기사. (대한매일신보. 1909. 6. 17.)
▲ 이은찬 교수형 집행 기사. (대한매일신보. 1909. 6. 17.)

 

▲ 경성부 한복판 용산에 점령해 있던 일본군사령부. (1904년 한국주차군사령부에서 경술국치 후 조선주차군사령부로 이름을 바꿨다)
▲ 경성부 한복판 용산에 점령해 있던 일본군사령부. (1904년 한국주차군사령부에서 경술국치 후 조선주차군사령부로 이름을 바꿨다)

 

◆ 국수보복(國讐報復) 위한 전기의병 일으키다

1895년 을미왜란(일제 식민용어 을미사변) 때 일본 군경과 자객에 의해 왕비가 참살을 당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유생이었던 그는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여 안동의병이 해산될 무렵 대구부에서 가까운 김천·성주 등지로 나아가 이기찬·조동석·허위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1896년 3월23일(음력 2월10일), 김산(경북 김천의 옛 이름) 장날을 기회로 삼아 김산읍으로 가서 장정 수백 명을 모집하고, 이어 금릉 관아로 들어가서 무기와 군수품 등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준비해 간 격문을 각 고을에 보내어 널리 군사를 모집하고 부서를 정하니, 이른바 김산의진이었다.

대장 : 이기찬

군문도총 : 조동석

찬획 : 강무형(姜懋馨)

참모장 : 허위

서기 : 이시좌(李時佐)·여영소(呂永昭)

중군 : 양제안(梁濟安)

선봉 : 윤홍채(尹鴻采)

김산의진은 의소를 김산과 성주 두 곳에 설치하고 서로 호응하여 대구부로 진격을 준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대구관찰사는 관군을 급히 출동시켜 먼저 성주진을 습격하고, 경군과 공주의 관군이 연합하여 대공세를 펴니, 의병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이은찬 등은 관군에게 피체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기찬 대장을 중심으로 한 의진은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영동, 황간, 문경으로 나아가고, 허위 참모장을 중심으로 한 의진은 진천 방면으로 진출하였지만 이미 의병해산령이 내린 후였기에 큰 호응이 없었다. 이에 허위 참모장은 '의병을 해산하라'는 선유조칙을 받고 해산하고, 이기찬 대장이 이끌었던 의진은 군문총독 조동석이 대신 맡았다가 얼마 후 해산하였다.

▲ 경성지방재판소·경성공소원·대심원의 모습. (1909년 7월 대심원을 고등법원으로, 1912년부터 재판소를 법원, 공소원을 복심법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 경성지방재판소·경성공소원·대심원의 모습. (1909년 7월 대심원을 고등법원으로, 1912년부터 재판소를 법원, 공소원을 복심법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 국권회복(國權恢復) 위한 후기의병 일으키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다시 강원도 홍천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907년 광무황제가 일제에 의해 퇴위당하고 군대마저 해산되자 본격적인 의병투쟁에 나섰다. 그는 그해 9월 강원도 원주·평창 일대에서 이구채(李球采, 일명 구재九載)와 더불어 해산군인 80명을 포함한 의병 500명을 모집한 뒤 강원 북부지방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던 이인영(李麟榮) 의진과 연합 전선을 모색하고자 하였으나 이인영 의병장이 부친의 병환으로 인해 경북 문경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고 그를 찾아갔다.

이인영은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일찍이 등과해서 1894년 참의내무부사(종전의 이조참의)를 거쳐 동부승지로 있던 중, 을미왜란이 발발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여주에서 5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춘천과 양구 사이에서 일본군과 30여 차례 격전을 벌였고,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의진과 호응하여 의병투쟁을 벌였으나 국왕의 의병해산 선유에 따라 의병을 해산한 바 있었다. 그 후 다시 등용되어 1900년 평리원 수반판사, 법부 법무국장을 거쳐 육군 부령(副領) 겸임 법관양성소장으로 있었다.

1904년 2월 일제가 러일전쟁을 일으켜서 경성 한복판인 용산에 '한국주차군사령부'를 두고 군율통치를 하고, 그해 8월22일 일본특명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부왜내각(친일내각 용어 부적절)의 외무대신 윤치호가 체결한 이른바 '제1차 한일협약'(일제 식민용어. 정식 명칭 '한일 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을 체결한 후 경제수탈을 위해 재정고문으로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大郞)를 내세웠으며, 일본 외무성과 통감부에서 활약하던 D. W.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를 외교고문으로 내세워 사실상 외교권을 박탈하자 다시 벼슬을 내놓고 의병을 모아 강원 북부지방에서 의병투쟁을 벌였는데, 부친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전갈을 받고 문경으로 귀가하여 부친의 병환을 돌보고 있던 터였다.

이은찬은 이구채와 함께 이인영에게 관동창의소 대장이 되어 의병을 이끌어 줄 것을 나흘 동안 간곡히 권유한 끝에 이인영이 이를 수락하자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니, 호응하는 의병이 몰려들었고, 마침내 관동창의소 의진을 형성하니, 대단한 진용이었다.

관동창의대장 이인영

총독장 이구채

중군장 이은찬

좌군장 방인관(方仁寬)

우군장 권중희(權重熙, 본명 중설重卨)

유격장 김해진(金海鎭)

좌선봉장 정봉준(鄭鳳俊)

우선봉장 김병화(金炳和)

후군장 채상준(蔡相俊)

운량관 현이보(玄履甫)

재무관 신창선(申昌先) 민춘원(閔春元)

좌총독장 김현복(金顯福)

우총독장 이귀성(李貴成)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