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쓴' 대중일보 '뿌리' … '새로 쓸' 디지털 미디어

1988.7.15 언론 암흑기 벗어나
대중일보 뿌리 인천신문 창간
인천 시세 확장 역동적 이끌어
창간 2주년때 인천일보로 변경

인천·경기 대표 지역지 발돋움
수원 체전·최악 물난리 등  조명
시민·도민과 수재민 돕기 나서

인천 여학생, 일 강제 위안부로
캄보디아 훈 할머니 귀향 소식
인현동 호프집 대형 화재 참사
연이은 특종으로 드높인 명성

1990 CTS 시스템 첨단제작 원년
1991 새사옥 착공해 2년뒤 기공식
1997 시대에 부응 가로짜기 시행  
2000 조간 전환 20면 발행 체제로

2007 신문산업 위축등 영향 격랑
경영 위기·노사 갈등·법정관리
새 경영진·대주주 맞아 안정회복

2018 인천일보 TV 역사적 개국
2019 지역 대표언론 부활 신호탄
2020 디지털퍼스트 원년 갖추고
통합CMS 제작 시스템 전면 전환
1973년 7월 유신독재 정권의 언론통폐합에 따른 15년 동안의 암흑기를 딛고 1988년 7월 15일 창간한 인천일보(당시 제호 인천신문, 1990년 인천일보로 제호 변경) /인천일보 DB
1973년 7월 유신독재 정권의 언론통폐합에 따른 15년 동안의 암흑기를 딛고 1988년 7월 15일 창간한 인천일보(당시 제호 인천신문, 1990년 인천일보로 제호 변경) /인천일보 DB

▲대중일보 뿌리를 지켜낸 인천일보 창간

박정희 유신정권에 의해 강제 통합되고 전두환 독재정권까지 암흑기를 보낸 인천의 언론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과 노태우(민정당 대통령 후보)의 6·29선언으로 언론 자유화를 맞게 되었다.

이에 옛 경기매일신문사, 옛 경기일보의 소속 주주들과 양사 출신 기자들은 1988년 7월 15일 인천일보(당시 제호 인천신문)를 창간했다. 인천일보는 일본 스미모토사의 고속 컬러 윤전기를 도입해 매일 12면 석간으로 발행했다. 당시 '인천일보 1기' 기자 모집에 전국 각지에서 100여 명이 넘는 지원자가 지원했다. 이 중 20명을 '인천일보 1기' 로 선발했다. 1990년 7월 창간 2주년 때 제호를 오늘날과 같은 인천일보로 바꿨다.
 

1988년 7월 15일 인천일보(당시 인천신문) 창간을 축하하는 임직원 일동이 사옥 현관에서 기념 촬영한 모습. /인천일보 DB
1988년 7월 15일 인천일보(당시 인천신문) 창간을 축하하는 임직원 일동이 사옥 현관에서 기념 촬영한 모습. /인천일보 DB

▲창간과 도약의 시대

인천일보가 창간한 1988년은 인천이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힘차게 웅비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의지가 결집하면서 가장 역동적으로 움직인 시기였다. 이기성(타계) 인천상공회의소 회장이 대표를 맡은 '인천시 발전협의회'가 발족했다. 인천일보는 창간 다음 날 7월 16일 자 1면에 '인천시 행정구역 확대가 불가피하다'는 기사를 실었는데, 이후 영종·용유도와 계양지역이 인천에 편입됐고, 4개 구에 불과했던 인천의 자치구는 6개로 늘어나는 등 시세가 대폭 확장됐다. 인천일보 창간을 기점으로 영종·용유도 갯벌을 메워 국제공항을 건설하고 송도 갯벌을 매립해 국제도시를 건설하려는 계획이 수립됐다. 인천일보는 창간호 1면에 송도 국제도시 계획을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2019년 11월 1일 광주광역시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9 지역신문 콘퍼런스'에서 인천일보 경기 본사 김현우 기자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인 영예의 대상을 받았다. /인천일보 DB
2019년 11월 1일 광주광역시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9 지역신문 콘퍼런스'에서 인천일보 경기 본사 김현우 기자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인 영예의 대상을 받았다. /인천일보 DB

▲인천∙경기의 대표 언론 역할 자임

인천일보는 인천뿐만 아니라 경기를 대표하는 언론으로서의 소명을 다 했다. 1989년 9월 26일 자 1면에 경기 수원에서 개막한 서울올림픽 1주년을 기념 제70회 전국체육대회 개막 기사를 보도했으며, 10월 2일 머리기사로 전국체전 폐막식에서 경기도가 3년 만에 종합우승의 영광을 안았다는 기사를 전했다. 1990년 1월 1일 자 1면에 '분단의 종점'이라는 기획기사의 첫 출발을 연천군 신서면 신탄리역에서 시작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사진과 기사로 통일시대의 중추로서 경기도의 역할을 조명했다. 1991년에는 인하대 전자계산연구소와 공동으로 경기도민 500명을 대상으로 '경기 북부 분도 설문조사'(11월 12일 자 15면)를 진행해 경기도민의 여론을 전달했다. 1990년 인천∙경기지역 집중호우로 사망∙실종 34명 가옥 침수 500채, 이재민 1만명이 발생하는 최악의 물난리가 났을 때 이를 집중하여 보도했으며 수재민 돕기 의연 금품 접수창구를 마련해 인천시민과 경기도민과 재난 극복을 함께했다.


 

인천일보 1992년 1월 16일 자 1면 사진. 1944년 일제는 영화초등학교 여학생 8명을 일본군 강제위안부로 끌고 갔다. /인천일보 DB
인천일보 1992년 1월 16일 자 1면 사진. 1944년 일제는 영화초등학교 여학생 8명을 일본군 강제위안부로 끌고 갔다. /인천일보 DB

▲전 국민의 이목을 모은 연이은 특종보도

1992년 1월 15일에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가 인천 창영초 여학생 2명, 영화초 여학생 8명을 일본군 강제위안부로 끌고 간 사실을 특종보도해 일제의 잔악상을 폭로했다. 1996년 동국제강 인천제강소 특정 산업폐기물 수만t을 공장 내 건물지하와 경기 대부도 폐염전 등지에 불법매립한 사실을 특종보도했다. 1997년 일제 때 위안부로 끌려가 55년 동안 캄보디아에서 살았던 '훈 할머니'의 귀향 소식을 국내 최초로 보도했다. 인천일보는 캄보디아 프놈펜 현지에 취재반을 급파해 심층 보도했다. 이밖에도 경기은행 퇴출 저지 로비 사건, 고잔동 유리섬유 불법 매립 사건,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 인천공항 입국 비리 사건 등 특종 기사들을 연이어 보도하며 인천·경기를 대표하는 지역 언론으로서 명성을 드높였다.
 

 

1999년 10월 30일 인천 중구 인현동 호프집 화재 사건 기사와 사진. 인천일보는 현장 사진을 국내 및 해외에 특종 보도해 그해 '이달의 기자상' 전문보도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인천일보 DB
1999년 10월 30일 인천 중구 인현동 호프집 화재 사건 기사와 사진. 인천일보는 현장 사진을 국내 및 해외에 특종 보도해 그해 '이달의 기자상' 전문보도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인천일보 DB
2019년 10월 인현동 화재사건 20주기 추모식에서 도성훈 인천시교육감, 이용범 시의회의장 등이 헌화하고 있다. /인천일보 DB
2019년 10월 인현동 화재사건 20주기 추모식에서 도성훈 인천시교육감, 이용범 시의회의장 등이 헌화하고 있다. /인천일보 DB
2011년 7월 강원도로 자원봉사를 떠났다가 산사태로 목숨을 잃은 인하대 학생 10명의 합동분향소에서 동료 학생들이 분향하고 있는 모습. /인천일보 DB
2011년 7월 강원도로 자원봉사를 떠났다가 산사태로 목숨을 잃은 인하대 학생 10명의 합동분향소에서 동료 학생들이 분향하고 있는 모습. /인천일보 DB
2017년 2월 국방부가 화성 화옹지구를 군공항 예비이전지구로 선정하자 관련 주민들이 찬반 입장이 엇갈린 현수막을 내걸은 모습. /인천일보 DB
2017년 2월 국방부가 화성 화옹지구를 군공항 예비이전지구로 선정하자 관련 주민들이 찬반 입장이 엇갈린 현수막을 내걸은 모습. /인천일보 DB

▲지역민들과 함께해온 기쁨과 슬픔 32년

1994년 12월 정부가 인천 옹진군 굴업도에 핵폐기물 처리장을 건설하기로 확정하자 인천시민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인천일보는 지역의 반대 여론을 전달 보도함으로써 핵폐기물 처리장 철회에 기여했다. 1999년 10월 30일 133명의 청소년 사상자가 발생한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사건을 호외로 보도하고, 이어 사고의 원인과 피해현황을 심층 보도했다. 특히 화재 참사 현장 내부 모습을 국내 언론 가운데 유일하게 촬영, 특종보도했다. 이 사진은 국내 주요 언론과 로이터통신, 헤럴드 트리뷴지 등 외국 주요 언론에도 보도됐다. 2010년 11월 23일 발생한 북한의 연평도 포격사건 현장에 취재기자를 급파해 남북한 긴장 상황을 현장에서 전했다. 2011년 7월 28일에는 농촌마을로 자원봉사를 떠난 인하대 학생들이 산사태로 10명이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사고를 보도했다. 2019년 경기 수원지역 최대 현안 가운데 하나인 수원 군 공항 이전 문제와 관련해 소음측정, 여론조사, 영상취재 등 입체적으로 보도해 주민 피해 상황과 주민들의 목소리를 전달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군 소음 보상법' 제정을 끌어내는 성과를 이뤄냈다.

 

▲도전과 응전의 시대

인천일보는 1991년 10월 18일 자 신문에서 지령 1000호 발행을 계기로 새 사옥 착공을 선언했다. 이전 해에 전산제작시스템(CTS)을 도입해 첨단방식에 의한 신문제작의 새 장을 연 데 이은 새로운 도약이었다. 이어 1993년 3월 1일부터 전산제작시스템을 전면 도입했다. 1993년 6월 14일 새 사옥 기공식을 가졌다. 1995년 7월 15일 창간 7주년을 맞아 첨단 천연색 고속윤전기를 도입했다. 1997년 11월 11일부터 가로짜기를 전면 도입하며 인천∙경기의 대표 언론으로서 미래를 착실히 준비해갔다. 새 천년 시대로 접어든 2000년 7월3일에는 기존 석간에서 조간으로 전환하며 20면을 발행했다.

그러나 인천일보에게도 격랑이 찾아왔다. '지역신문발전기금 우선지원 대상사'가 실시된 첫해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 연속 지역신문발전기금 우선지원 대상사로 선정되며 위상을 높였으나, 대형 신문의 물량 공세와 신문산업의 위축으로 인한 경영위기와 노사갈등을 겪어야 했다. 3년 간의 법정관리를 겪어야했다. 그러나 법정관리를 벗어나고 새 경영진과 새 주주를 맞이하며 다시금 안정을 찾게 되었다.
 

2018년 1월 2일 인천일보TV 방송국이 문을 열었다. 인천일보는 인천일보TV 개국으로 종합미디어로 도약하고 디지털 미디어 시대를 선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인천일보 DB
2018년 1월 2일 인천일보TV 방송국이 문을 열었다. 인천일보는 인천일보TV 개국으로 종합미디어로 도약하고 디지털 미디어 시대를 선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인천일보 DB

 

▲디지털 미디어를 향한 날갯짓

.2018년 1월 2일 인천일보TV를 개국하며 종합미디어로 날갯짓했다. 2019년 11월 1일 광주광역시에서 열린 '2019년 지역신문콘퍼런스'에서 영예에 대상을 거머쥐며 지역언론의 대표주자로서의 극적인 부활을 알렸다. 또한 2020년도 '지역신문발전기금 우선 지원 대상사' 선정됨으로써 명실공히 바른 언론, 경기·인천 지역의 대표 언론임을 인정받게 됐다. 2020년에는 디지털 퍼스트의 원년으로 삼고, 4월 19일 종이신문 위주의 뉴스제작시스템을 디지털 미디어 중심의 통합 CMS로 전격적으로 전환해 새로운 뉴스제작시스템을 갖췄다.

1988년 7월 15일 창간의 깃발을 올린 인천일보는 창간 32주년을 맞은 오늘까지 대한민국 지역 언론사를 새로 써왔다. 또한 인천∙경기 지역민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겪고 나눴다. 인천시민을 비롯한 경기도민의 애정을 받아온 인천일보는 정론·직필의 길을 걸어왔다. 32주년의 역사를 날개 삼아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 시대를 열어나가려고 준비하고 있다.

/조혁신 기자 mrpe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