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 아닌 정전의 바다, 평화의 봄 언제오나

하와이 노동이민·김옥균 망명·일본인 탈출 이뤄진 인천항
박팔양 시 '인천항' 통해 유랑·추방·망명 함축적으로 묘사

연평해전·포격과 천안함 침몰 … 분단 이후 발생한 비극
남북정상간 합의한 서해평화협력지대 아직도 요원

 

▲ 2010년 11월23일 오후 2시30분 경 북측이 대한민국 인천 옹진군 연평면의 대연평도를 향해 포격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해병대원 전사자 2명, 군인 중경상 16명, 민간인 사망자 2명, 민간인 중경상 3명의 인명 피해와 각종 시설 및 가옥 파괴로 재산 피해를 입었다. 사건 당일 포격받은 대연평도 마을에서 연기가 솟고 있다. /인천일보DB
▲ 2010년 4월 15일 인천 백령도 해역에서 침몰했던 천암함이 인양되고 있다. /인천일보DB
▲ 연평해전 피해 유가족들이 흉상을 만지며 슬퍼하고 있다. /인천일보DB

 

조선의 서편항구 제물포 부두.

세관의 기는 바닷바람에 퍼덕거린다.

잿빛 하늘, 푸른 물결, 조수 내음새,

오오. 잊을 수 없는 이 항구의 정경이여.

 

上海로 가는 배가 떠난다.

저음의 기적, 그 여운을 길게 남기고

유랑과 추방과 망명의

많은 목숨을 싣고 떠나는 배다.

 

어제는 Hongkong, 오늘은 Chemulpo,

또 내일은 Yokohama로,

세계를 유랑하는 코스모포리탄

모자 빼딱하게 쓰고, 이 埠頭에 발을 나릴제

- 박팔양의 시 '인천항' 부분

 

 

위 시는 1927년 인천에서 발간된 순문예지 습작시대 창간호에 발표된 박팔양의 시 '인천항'이다. 황해바다를 통해 세계로 열려 있던 인천항의 개방적인 면모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시다. 시인의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항이기에 인천항의 개방적인 면모만을 찬양하지 않고, “유랑과 추방과 망명”이라는 서사적 용어로 인천항의 특장을 압축해놓았다.

인천항을 통해 조선을 부국강병 시키려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김옥균이 망명했다. 인천항을 통해 미지의 세계로 노동이민을 떠났던 하와이 이민들은 언제 돌아올지 모를 삶의 유랑길에 올랐으며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와중에 조선을 찾았던 외국인들이 인천항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일제와의 독립전쟁의 와중에 인천항을 통해 많은 독립지사들이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다. 한편으로 홍콩, 요코하마와 황해바다로 연결돼 수많은 “코스모포리탄”들을 드나들었던 인천항엔 첨단의 모더니티가 넘실대기도 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 다시 전쟁이 불어닥쳐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올 때마다 인천항은 얼어붙었다. 1945년 8·15 해방을 통해 일본인들이 인천항을 탈출하고 유엔군이 인천항으로 상륙해 식민항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었지만, 38도선을 경계로 진주한 남과 북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군의 분할통치라는 장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기어이 6·25전쟁의 전화를 입었다. 인천항은 또다시 황해바다로 열린 항구로 기능하지 못하고 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는 정전체제로 차갑게 얼어붙은 항구가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감행된 노르망디상륙작전을 훨씬 능가하는 엄청난 화력이 집중된 9·15인천상륙작전으로 인천시가지는 초토화되었고 인천은 분단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항구도시가 되었다.

전후 분단체제 속에서 인천항은 바다 위에 그어진 북방한계선 NLL로 인해 황해바다의 반쪽이 얼어붙으면서 수도권의 임해공업항으로 기능이 축소되었다. 백령도와 연평도를 비롯한 서북5도와 인천 앞바다의 섬들에는 군부대가 진주하고 철조망과 용치가 설치돼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강화도를 비롯한 인천 해안에도 철조망이 설치되고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인천은 바다를 잃어버린 바다도시가 되었다.

가장 극단적인 좌우 정권이 정권을 잡은 전후 냉전체제 아래서 체제경쟁에 몰두하면서 얼여붙었던 황해바다에는 비극적인 사건들이 잇따랐다.

민어며 조기, 대하로 넘실대는 황해바다의 풍부한 어족자원을 찾아 뱃길을 다투던 어민들이 납북어민이 되어 북으로 끌려갔다가 남으로 귀환해선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납북어선과 어민은 모두 459척 3651명, 이 가운데 1327명이 반공법 위반 등으로 처벌받았다. 전쟁 통에 얕은 황해바다를 건너온 실향민들은 고향에 돌아갈 날만 기다리며 인천을 떠나지 못하고 모진 세월을 견디고 견디다 눈을 감고 있다.

1990년대 들어 전세계적으로 동서 냉전체제가 허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분단체제는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지더니 인천 앞바다에선 연이어 비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났다. NLL을 둘러싼 남북간의 분쟁은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으로 이어져 남북 병사들이 교전 중 전사했다. 2010년 3월26일 어두운 밤,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해군 제2함대 소속의 초계함 천안함이 침몰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국방부는 북한 잠수정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고 밝힌 이 사건으로 승조원 104명 중 46명이 전사했다. 2010년 11월23일 오후 2시 30분경, 연평도포격사건이 일어났다. 휴전 협정 이후 인민군이 대한민국의 영토를 직접 타격한 최초의 사건으로 해병대원 2명, 민간인 2명이 사망하고, 군인 중경상 16명, 민간인 중경상 3명이 발생하였다. NLL을 둘러싼 남북간 갈등 속에 대규모의 중국 어선들이 영해를 침범해 불법어로를 일삼고 있다.

종전이 아닌 정전상태, 황해바다는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분단의 바다로 갇혀 있다. 2007년 10·4남북정상회담에서 최초로 합의했고 2018년 판문점공동선언으로 재확인됐던 서해평화협력지대는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분단의 고통과 평화를 희구한 분단문학 속 인천

▲ 이원규 '황해'
▲ 이원규 '황해'

 

 

최인훈 '광장'

황순원 '나무들 비탈에 서다'

박완서 '엄마의 말뚝2'

이원규 '황해' '포구의 황혼'

분단의 아픔 생생히 나타내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는 생동감 넘치는 바다의 이미지로 시작되는 최인훈(崔仁勳)의 <광장>(1960)은 분단지대로 점차 화해가는 1949년 무렵, 마지막으로 겨우 열려있는 인천항의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해방 직후 월북하여 북에서 요직을 맡은 아버지를 둔 남한의 철학과 대학생 이명준은 “추악한 밤의 광장”인 남한 현실에 대하여 시니컬한 냉소로 거리를 둔다. 하지만, 북의 아버지 때문에 두 차례나 “S서 형사실”에 불려가 폭행과 함께 빨갱이 취급을 당한 후 그는 남한에서 꿈꾸던 삶이 무너진 걸 깨닫는다. 어떤 현실적이고도 실존적인 선택을 피할 수 없던 차에, 명준은 애인 윤애의 집이 있는 인천을 향한다. 그렇게 오게 된 인천과 단골처럼 찾게 된 인천 바닷가의 목로술집에서 은밀히 접한 “이북 가는 배”. 명준은 밀항선을 타고 월북을 결행해 북한 체제를 경험하고는 전체주의체제에 실망한다.

작가 최인훈은 분단시대 북과 남을 비판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소설적 거점으로써 은밀히 밀항할 수 있는 인천항을 설정, 분단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후일 전쟁포로가 된 이명준이 휴전 후에 남과 북을 모두 버리고 중립국행을 택해 떠나는 뱃길에서 자살한다는 상징적이다. <광장>과 같은 해에 발표된 황순원(黃順元)의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1960)는 바로 그 한국전쟁과 참전했던 젊은이들의 전쟁 체험과 일그러진 전후의 삶을 치밀한 서사구조와 상징들로 보여준 소설이다. “이건 마치 두꺼운 유릿속을 뚫고 간신히 걸음을 옮기는 것같은 느낌이로군.”이라는 소설의 첫문장이 바로 전쟁과 전후를 헤쳐나가야 하는 젊은이들의 실존적 상황을 압축하고 있다. 박완서(朴婉緖)의 <엄마의 말뚝 2>(1981)에서 그려진 월남민 가족사를 통해서도 우리는 분단의 질곡과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다. 해방 후 좌익에 가담하였다가 전향했던 오빠는 6·25 전란의 와중에 인민군에 의해 비참하게 죽는다. 수복 직후 어머니는 며느리의 의견도 무릅쓰고 죽은 아들의 시신을 화장해 들고는 북쪽 고향 개풍땅이 보이는 강화도 북쪽 해안을 찾는다. 그리고는 바람 속에 통절한 슬픔을 가슴에 묻는 장면을 처연하게 보여준다. 30년 동안 가슴 속에만 묻어두었던 강화에서의 아픈 기억이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현실을 <엄마의 말뚝 2>는 “분단이란 괴물” 때문이라고 고발한다.

“분단이란 괴물”이 인천을 바꿔놓은 것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인천의 해안이란 해안에는 모두 철책이 둘러쳐 있고, 웬만한 산들에는 군부대가 똬리를 틀고 있다. 인천의 작가 이원규(李元揆)는 여러 소설을 통해 분단지대 인천을 형상화해왔다. 그의 장편 황해(1990)는 해방 전후의 인천과 인근의 섬을 배경으로 그곳 사람들의 삶과 좌익운동의 전개과정을 사실적으로 복원한 소설로, 값진 분단문학의 성과이다. 그의 단편 <포구의 황혼>(1987)은 소래포구에 살고 있는 월남 실향민 박영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북쪽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미련 때문에 한때 납북도 되었다가 남쪽에서 이룬 가정에 안주하지 못하는 아버지, 지금은 심신이 병들고 실어증에 걸린 아버지를 큰아들 용규는 이해하지 못한 채 오랫만의 함께 뱃길에 나선다. 북위 37도 25분, 어로저지선이 있는 해역에서 용규는 아버지가 은밀히 북쪽으로 보내려고 준비한 편지가 담긴 플라스틱 패트병을 발견하고는 아버지에게 분노한다.

 

황해도 연백군 해룡면 맹산리 용암포 구 이금자와 아들 박용만 박용근 딸 박혜숙에게

세월이 또 무상허게 흘러갓소. 두 번이나 당신과 이이들을 버린 거슬 용서하오. 이재 늘거 귀눈 흐려지고 수족도 차겁소. 주글 날이 을마 안 나마 다시 당신과 아이들을 몯 볼 거 갓소. 남쪽 아이들 이름과 나이가 용규 31살 용철 28살 진숙 26살 용진 23살이라는 걸 거기 아이들이 잇지 안케 해주오.

<인천 소래 포구 박영구 씀>

-이원규 <포구의 황혼>

 

이산가족의 문제는 분단시대가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의 하나이건만 분단체제하에서 지금까지도 요원한 문제로 남아 있다. 어떻게든 편지를 북의 가족에게 보내려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을 아들 용규도 마침내 이해하게 되고, 부자는 함께 간절한 염원이 담긴 편지를 해류에 실어 북으로 띄워 보낸다. 오랜 분단의 아픔과 원망을 부자간의 이해와 화해로 바꾸어 돌아오는 황혼 속의 귀항을 <포구의 황혼>은 감동적으로 그려내었다. 문갑도 출신의 시인 이세기는 먹염바다(2005) 이후 시적 언어로 분단으로 얼어붙은 황해바다의 평화로운 삶을 희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