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더미가 된 마을…아이는 주저앉아 울었다

인천, 6·25전쟁 전선 남북으로 오가며 엄청난 피해
맥아더 장군 '인천상륙작전' 승리로 전세 바꿨지만
미 해군 포탄으로 쑥대밭 … 인명피해 셀 수 도 없어

 

 

 

▲ 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의 소녀. 1950년 9월16일.
▲ 폭격으로 불타는 인천
▲ 폭격으로 불타는 인천

 

청일, 러일전쟁에 이어 한반도에 또 한 차례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왔다. 두 차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주의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도발한 데 이어 진주만 공습을 감행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의 주 전선은 중국 대륙과 동남아시아에서 전개됐지만, 황해바다와 인천의 상공에는 연합국의 일본의 공군기들이 출몰했고, 인천의 도심 곳곳에는 방공호가 파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도발한 주축국에 맞서 국제연대를 모색한 연합국은 1943년 12월 카이로선언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고, 1945년 7월의 포츠담선언에서 이를 재확인했다.

가미카제 특공대를 내세우며 '일억옥쇄(一億玉碎)'를 외쳤던 일본 제국주의는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이후에야 천황이 항복했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러일전쟁으로 인해 식민지로 떨어졌던 한반도는 다행히 태평양전쟁의 전란을 입지 않고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었다. 그러나 연합국의 세계균형과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각각 미·소 양군이 진주해 분할, 점령되었다. 새로운 전쟁이 씨앗이 해방과 함께 한반도의 38선 위에 뿌려졌다.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진영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진영 간 대립이 한반도에서 터진 것이다.

1950년 1월 10일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G. Acheson)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방위선 구상을 발표했다.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 방위선을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선으로 변경하면서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배제된 것이다. 한반도에서 힘의 공백 지대가 발생하자 동·서 진영 간 열전이 터졌다. 전후 냉전 시대를 결정짓는 한국전쟁(Korea War)이 발발한 것이다. 전쟁의 명칭에 관하여 국내 학계에서는 '6·25전쟁'과 '한국전쟁'이라는 명명을 둘러싼 극명한 시각차를 노정하고 있다. 동족상잔의 전쟁이 남긴 전쟁의 고통과 휴전체제 하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 그리고 이념의 대립이 무한 반복되고 있다. 한국전쟁은 아직도 휴전 상태에 있는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 인천상륙작전 전개도
▲ 인천상륙작전 전개도

전선이 남에서 북까지 두 차례나 오가며 전 국토, 모든 도시가 전란의 화를 입지 않은 곳이 없지만, '황해의 배꼽'에 위치한 인천, 38선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인천은 해상과 육상, 심지어 하늘을 통해서도 엄청난 참화를 겪었다. 6월 25일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은 6월 27일 서울이 점령되고 7월 3일에는 한강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진을 계속하였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보병사단이 즉시 한국으로 이동하여 적의 진격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전세를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유엔군은 부산을 거점으로 한 낙동강 방어선을 확보하여 항쟁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일본 도쿄에 있던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D. S. MacArthur)는 급기야 1950년 9월 15일 대대적인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인천을 선택해 기습 상륙해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함이었다.

북한군에게 혼선을 주기 위해 동해안이 삼척과 함께 황해의 남포와 군산, 인천 등지에 9월 4일부터 9월 14일까지 F4U 콜세어를 동원하여 폭격을 가하였다. 9월 10일엔 새벽부터 세 차례에 걸쳐 월미도를 집중 폭격해 모든 은페물을 없애는 작전을 전개했다.

9월 15일 인천 상륙 당일 작전에 참여한 함선은 한국 15척, 미국 226척, 영국 12척, 캐나다 3척, 호주 2척, 뉴질랜드 2척, 프랑스 1척으로 7개국 261척이었다. 동원된 비행기는 무려 1천여 대였고 함포사격과 함재기의 엄호를 받은 주력부대는 20분 만에 월미도를 탈환하고 계속해서 인천 해안에 상륙했다.

한국전쟁의 전세를 일거에 바꾼 인천상륙작전은 그러나 인천과 시민들의 커다란 희생이 바탕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9월 15일 새벽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자 인천 앞바다를 가득 메운 미 해군 군함에서 발사된 엄청난 함포의 포탄은 월미도와 인천시가지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한국전쟁은 비단 도시의 물적 파괴뿐만 아니라 엄청난 인명 피해를 초래하였다. 피아간 군인의 피해도 작지 않았지만, 특히 민간인 희생자가 얼마나 발생했는지 현재까지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에 가려진 월미도 원주민들 아픔

 

미군 폭격 뒤 군사기지로

피해주민 귀향 감감무소식

 

▲ 지난해 개최된 월미도 위령제
▲ 지난해 개최된 월미도 위령제

1950년 9월 10일 새벽, 인천상륙작전의 사전예방작전으로 미군 해병대 함재기들이 월미도 원주민 어촌마을을 폭격했다. 이 사건은 그간 인천상륙작전의 신화화된 일방적 기억에 의해 가려져 철저히 망각되었다가 2008년 2월 26일 국가기관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로 약칭) 제66차 전원회의에서 '월미도 미군 폭격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짐으로써 57년 만에 그 실체가 드러났다.

이 사건을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해달라고 신청한 월미도 원주민들은 2001년 9월 월미산 일대에 자리했던 해역사령부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인천시가 800억 원의 세금을 들여 국방부로 부지를 매입하여 월미공원을 조성하려 하자, 공원 앞에 천막을 치고 고향 마을로 귀환을 촉구하면서 농성장을 차리고 국가에 진실규명을 촉구하기 시작하였다. 2017년 진실화해위 조사관들은 미국에서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의 실체를 입증해주는 항공공격보고서(Air Attack Reports)를 찾아냈다. 이 문서는 1950년 9월 10일 월미도를 폭격한 미 해병 제1해병비행단 제33해병비행전대 소속 함재 전투기대대인 제214 해병 전투비행대대와 제323 해병 전투비행대대의 보고서이다.

항공공격보고서는 1950년 9월 10일 3차에 걸친 월미도 동쪽 지역에 대한 폭격과 기총소사한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월미도 무력화는 9월 10일에 북한 포병부대의 나무엄폐물을 불태우기 위한 해병대 폭격기들(TG-95.5)의 네이팜공격과 함께 시작되었다. 제323 해병 항공기(VMF-323)의 비행기 6기와 제214 해병 항공기(VMF-214)의 8기가 새벽 6시 호위 항모(CVE)에서 이륙하여 섬의 동쪽을 초토화했다. 14기로 이루어진 다음 폭격 편대는 연기가 충분히 제거되어 시야가 확보될 때까지 몇 분 동안 선회비행을 한 후 재차 네이팜 폭격을 가하였다. 정오 직전에 호위항모(Sicily호, Badoeng Strait호)에서 출격한 세 번째 공습 폭격기들은 꼽추 모양의 월미도의 한쪽에서 다른 쪽까지 불길에 휩싸이게 했다고 기록하였다.

2008년 진실화해위는 월미도 미군 폭격사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면서 “전쟁이 끝난 뒤 월미도는 군사기지가 됐고, 유족과 거주민은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해 큰 고통을 겪고 있다”며 이들에게 귀향, 위령 사업 지원을 비롯해 명예회복조치를 하라고 권고했다.

이에 따라 지난 2011년부터 월미도 피해주민 귀향 지원을 위한 조례가 인천시의회에 수차례 발의됐다. 그러나 행정안전부는 한국전쟁 중 일어나 사건은 지자체의 사무가 아닌 국가 사무라는 이유로 조례 제정을 반려했다. 국회에서는 수차례 월미도 원주민 귀향을 위한 특별법이 발의됐지만, 여야 간 합의 불발로 폐기되곤 했다.

이에 인천시에서는 지난해부터 월미도 원주민들의 장기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위원회를 구성하고 논의를 거듭한 끝에 월미도 원주민들의 생활 안정을 위한 조례를 제정해 올 하반기부터 소정의 지원금을 매월 지급할 예정이다. 그러나 월미도 실향민들은 생활 안정 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한 시의 조치를 반기면서도 국가가 귀향 대책을 조속히 마련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