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으로 거래한 '차' … 일상처럼 마셨던 고려인들

 

▲ 최초로 차를 발견한 농업·약초의 신 '신농'
▲ 최초로 차를 발견한 농업·약초의 신 '신농'

삼국시대에는 '매우 값진 것'으로 전해져
왕실·사찰서 수양·공양할 때 대표 애호품

고려 들어서는 재배법 받아 평민들도 애용
특히 비색 찻잔에 따라 마시는 풍류야말로
문인에겐 없어선 안될 '다도'로 자리 잡아

'귀한 차' 선물받은 왕족출신 승려 의천은
고마움에 시를 남기고 불사 석탑에 바쳐
700년 뒤 흥선대원군 부친묘 옮길 때 발견
기록만 남은 '용단승설차' 국보됐을 수도



황해를 오간 교역품 중에서 빠질 수 없는 물품이 차(茶)이다. 차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가 애용하는 기호식품이다. 차의 품질도 중원이 최고였다. 중원의 차는 황해를 통해 한반도와 일본으로 퍼졌고, 동남아시아를 거쳐 유럽에도 전해졌다. 아편전쟁의 기원도 차에서 비롯됐다.

중국의 남방 도시 샤먼(厦門)은 송나라 때 처음으로 차(茶)를 수출한 항구다. 이 지역에서는 차를 '떼(te)'라고 발음한다. 영어의 '티(tea)'도 이곳의 발음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독일,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도 비슷하게 부른다.

우리나라에 차가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다. 신라 선덕여왕 때에는 국내에서도 차를 생산하였다. 초기에 차는 매우 귀한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왕실이나 부처님께 공양하는 물품으로 쓰였다. 왕실과 사찰에서 시작된 다례(茶禮)는 수양과 공양에 없어서는 안 될 대표적인 애호품이 되었다. 임금에게 차를 진상하는 국가적인 의식인 '진다의례(進茶儀禮)'를 행할 만큼 차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차는 왕실의 하사품으로도 사용됐다. 신라 경덕왕 때 두 개의 해가 나타나는 변괴가 생겼다. 이에 월명(月明)스님이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부르니 해괴한 일이 사라졌다. 왕은 좋은 차 한 봉지와 백팔 수정염주를 하사했다.

고려시대에는 차가 일상화됐다. 삼국시대의 재배법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전 시대에 비해 차 문화가 융성해졌다.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다녀간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는 고려인들의 차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이 있다.

'고려에서 생산되는 차는 맛이 쓰고 떫어 마실 수 없을 정도이다. 그들은 오직 중국의 납차(蠟茶)와 용봉단차(龍鳳團茶)를 귀중하게 여긴다. 황제가 하사해 주신 것 이외에도 상인들이 가져다가 팔기 때문에 근래에는 차 마시기를 매우 좋아한다.'

고려는 송나라와 활발한 무역을 하였는데 '먹을거리' 부분에서 주로 인삼(人蔘)을 수출하고, 차를 수입하였다. 왕실과 귀족, 사찰의 승려 등에서 시작된 차 문화는 점차 확산되어 평민 사이에서도 널리 애용되었다.
특히, 비색의 찻잔에 차를 따라 마시는 풍류야말로 문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다도(茶道)였다. 고려 왕족 출신의 승려인 의천(義天)은 송나라에서 유학할 때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그가 구법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도 스승이 귀한 차를 선물하였다. 그 차는 황실의 다원(茶園)에서만 생산되는 것으로 용봉차에 비견되는 것이었다. 귀한 차를 받은 의천은 그 즉시 고마운 마음을 표하는 시를 남겼다.

황실에서 가져온 신선한 차를 北苑移新焙
동림에 계신 스님께서 보내주셨네 東林贈進僧
한적하게 차 다릴 날보다 먼저預知閑煮日
찬 얼음 깨고 샘줄기를 찾는다네泉脈冷高永

의천이 받았던 귀한 차가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었다. 때는 1846년,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부친인 남연군 이구(李球)의 묘를 충남 예산군 덕산면으로 옮길 때다. 이곳에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위치가 천하의 명당자리였다. 대원군은 주지(住持)에게 일만 냥을 주고 불을 지르게 했다. 폐허가 된 절터의 탑을 부수고 그 자리에 묘를 이장했다. 그런데 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여러 물건이 나왔다. 한말의 우국지사인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매천야록』에 보면, '백자(白磁) 두 개', '단차(團茶) 두 병', '사리주(舍利珠) 3매(枚)'였다.

'둥근모양의 차(團茶)'는 의천뿐만 아니라 고려인들이 가장 귀하게 여겼던 '용봉단차'이다. 이 차는 송 휘종(徽宗) 때인 1120년경에 만들어진 매우 귀한 차인데, 어떻게 가야사의 탑 속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일까. 대원군에게서 이 차를 조금 얻을 수 있었던 이상적(李尙迪)이 남긴 산문 '용단승설차를 기억하다(記龍團勝雪)'에 그 답이 있다.

'송나라 인종 때 벌써 작은 용단(龍團) 차가 있었으나 오로지 승설(勝雪)이라는 이름은 휘종 선화(宣和) 2년(1120년)에 비롯되었다. 고려의 승려인 의천(義天), 지공(指空), 홍경(洪慶), 여가(如可)처럼 앞뒤로 바다를 통해 도를 묻고 경전을 구하러 송나라에 왕래한 사람이 줄을 이었음을 문헌에서 증명할 수 있다. 이때 이들은 필시 다투어 좋은 차를 구해서 불사(佛事)에 공양했을 터, 심지어 석탑에까지 넣어서 칠백여 년을 넘겨 다시 세상에 나오도록 하였다. 아! 참으로 기이하구나!'

차는 고려시대 송과의 교역에서 빠질 수 없는 필수 품목이었다. 이는 고려의 수준 높은 문화에 어울리는 기호품이자, 신심(信心) 넘치는 승려들이 공양(供養)물이기도 했다. 기록으로만 전하는 용단승설차가 오늘날 발견되었다면 어땠을까.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국보(國寶)가 되었을 것이다.

 


[농업·약초의 신 '신농'을 시작으로 … 한·중 물들인 '차']

 

▲ 송나라 시대 대중화된 차문화 모습이 담긴 그림.
▲ 송나라 시대 대중화된 차문화 모습이 담긴 그림.

"농업과 약초의 신인 신농(神農)이 수백 가지 풀을 먹다 독에 중독되어 정신을 잃고 나무 밑에 쓰러졌다. 그 때 바람을 타고 푸른 잎사귀 하나가 신농의 입으로 떨어졌다. 그 잎을 먹자 정신이 맑아지고 모든 독이 해독되었다."

중국에서의 차의 기원은 기원전 2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약 5000년의 역사다. 4세기 동진(東晉)시대의 『화양국지(華陽國志)』에는 '주나라 무왕 시절에 남방 파촉(운남, 귀주, 사천) 지역에서 향기 나는 차를 공납했다'는 기록이 있다.

주나라 이후 차는 북쪽으로 전파되어 확산되고 진나라가 통일한 이후에는 중원 전역으로 퍼졌다. 8세기 당나라 문인인 육우(陸羽)는 차에 대한 전문서적인 『다경(茶經)』을 집필했다. 이곳에는 야생 차나무에 대한 설명이 있다. "차는 남방의 아름다운 나무다. 한 자, 두 자 또는 수십 자에 이른다. 두 명이 함께 안아야 하는 것도 있는데 베어내서 잎을 딴다"고 하였으니 차나무가 무척 컸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차가 전래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흥덕왕 3년(828년)에 중국차가 전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사신 대렴(大廉)이 차 종자를 가져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도록 하였다.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번성하였다" 신라에 차가 전해진 시기는 중국에서도 차가 널리 유행하며 차문화가 번성할 때였다. 우리나라의 차문화는 고려시대에 꽃을 피웠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 거리마다 어디서든지 차를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차 소비가 왕성했다. 마치 요즘 길가 어디서든지 마실 수 있는 커피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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