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조선, 실학을 독하다] 7.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 - (1) 동무는 누구인가?
[아! 조선, 실학을 독하다] 7.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 - (1) 동무는 누구인가?
  • 여승철
  • 승인 2019.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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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의술로 장수할 방법 펴낸 한의학자
▲ '상교현토 동의수세보원'에 수록된 이제마 초상.

 

▲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이제마(李濟馬)의 호는 동무(東武)이다. 무관 벼슬을 하여 호를 동무라고 지었다. 자는 무평(懋平), 자명(子明)이다. 어릴 적 이름은 제마(濟馬). 전주이씨 안원대군파 <선원속보(璿原續譜)>에는 그의 이름이 섭운(燮雲), 섭진(燮晉)으로 되어 있다. 별호로 반룡산노인(盤龍山老人)을 썼다.

선생은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선생에게는 재미있는 탄생 이야기가 전한다.

선생의 아버지 이진사는 원래 술이 약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향교에서 일을 보고 오다가 주막에서 많은 술을 마시게 되었고 주모의 딸과 하룻밤을 보냈다. 이 주모의 딸은 박색이었다고 한다. 열 달이 지난 어느 날 새벽, 할아버지 이충원(李忠源·1789~1849)의 꿈에 어떤 사람이 탐스러운 망아지 한 필을 끌고 와서 "이 망아지는 제주도에서 가져온 용마인데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귀댁으로 끌고 왔으니 맡아서 잘 길러 달라"하고는 가버렸다. (이능화는 <조선명인전>에서 어머니가 제주도에서 가져온 말의 꿈을 꾸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능화의 기록에는 연대 등이 부정확하다.)

그 때 주모의 딸이 강보에 갓난아기를 싸안고 왔다. 충원은 꿈과 연결지어 모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이는 꿈에 '제주도 말'을 얻었다 하여 아기 이름을 '제마(濟馬,제주도 말)'라 지었다고 한다.

선생은 태조 이성계의 고조인 목조의 2남 안원대군의 19대손이다. 1837년(헌종 3) 3월19일 갑신일 오시에 함경남도 함흥군 주동사면 둔지리 사촌에 있는 반룡산(盤龍山) 자락 아랫마을에서 진사 이반오(李攀五·1812~1849)의 넷째 부인인 경주김씨 사이에서 장남이자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그러나 이진사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서자로 입적을 안 시켰다. 따라서 호적상으로 서손이 아니다.

선생은 7세부터 큰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고 10세에 문리가 트였다.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좋아하였다. 13세에 향시에 장원하였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같은 해에 모두 작고하여 집을 떠났다. 그 후 선생의 여정을 찾으면 의주의 홍씨 집에 머물며 서책을 탐독했다고 전한다. 1863년 27세에 운암(芸菴) 한석지(韓錫地·1769~1863)의 <명선록(明善錄)>을 발견하였다. 선생은 이 운암을 '조선의 제일인 자'라 칭송하였다. '명선(明善)'은 유학의 근본정신을 선(善)으로 규정하고 당시 성리학적 유학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서 유학의 원류를 찾아 '밝힌다(明)'는 비판적 의미가 담긴 책이다.

선생은 이후 35세인 1871년 연해주를 여행하고 <유적>을 지었다. 39세에 무과에 등용되어 다음해에 무위별선(武衛別選) 군관(軍官)으로 입위(入衛)되었고 1880년 44세에 <격치고(格致藁)>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선생은 50세인 1886년 경상남도 진해현감 겸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2월 현감으로 부임하여 1889년 12월에 퇴임하였다. 54세인 1890년 관직에서 물러나 서울로 왔으니 약 4년여의 관직이었다.

선생은 1894년 58세에 서울 남산에 있는 이능화(李能和·1869~1943) 집에서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상·하 2권을 저술 완료하였다. 이 <동의수세보원>은 '우리나라 의술로 평생을 장수하고 원기를 보전한다'는 의미이다. 60세인 1896년에 최문환(崔文煥)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정3품인 통정대부 선유위원(宣諭委員)에 제수되었다. (이에 대해서 최문환의 난은 항일의병활동의 일환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현재 최문환은 국가보훈처 공적조서에 그 이름이 보인다. 선생은 <동무유고> '답중천우순서'에서 "수구하는 자는 나라를 그르치고 개화하는 자는 나라를 어지럽힌다"고 하였다. 즉 수구와 개화 모두에 대한 양비론을 견지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선생이 최문환을 못마땅해 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선생은 이듬해 이 공로로 고원군수(高原郡守)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선생은 62세에 함흥에서 64세인 1900년 가을까지 만세교 옆에 '원기를 보존하는 곳'이란 뜻의 보원국(保元局)이라는 약국을 열었고 이 해 9월21일 문인(門人) 김영관의 집에서 생을 마감한다. 선생은 죽기 전에 자신의 묏자리를 미리 보아 놓고 그곳에 무덤을 쓰라고 일러 주었다 한다. 그러나 그곳은 '좌청룡'이 없는 묫자리였다. 그런데 뒷날 왼쪽에 저수지가 생겨 '수청룡'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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