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누리는 것, 선배 노동자 피·땀으로 얻었다"

 

▲ 지난달 31일 연수구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노동자의 삶, 굴뚝에서 핀 잿빛 꽃'을 주제로 열린 2019년 인천 민속 문화의 해 특별전의 첫 렉처 콘서트에 연사로 나선 양진채 소설가가 '문학으로 바라본 인천 노동자의 삶'을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이상훈 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

 

 

 

 

 

 

남생이·인간문제·새벽출정 등

개항기-일제강점기-산업화 기간

인천 노동자 삶 문학으로 소개

열악한 환경·치열한 투쟁 담아



부두 노동자인 소설 <남생이> 속 아버지는 소금을 나르는 고역을 견뎌냈다.

일제 강점기 공장 노동자들은 <인간문제>에 마주했다. 산업화 시기 <어느 돌멩이의 외침>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솟았고, <쇳물처럼> 뜨거웠던 198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새벽 출정>으로 전진했다.

지난달 31일 인천시립박물관 석남홀에서 '메이드 인 인천-노동자의 삶, 굴뚝에서 핀 잿빛 꽃' 특별전의 연계 프로그램으로 열린 '렉처 콘서트'의 첫 번째 시간. 양진채 작가가 '문학이 빚어낸 노동의 빛깔'을 주제로 무대에 올랐다.

양 작가는 인천의 역사를 일군 노동자의 삶을 문학 작품으로 돌아봤다. 개항기부터 일제 강점기, 산업화 시대를 지나는 동안 잿빛 꽃은 소설 문장에서도 피어났다.


'선창 벌이가 좋아. 하루 이삼 원 벌이는 예사고 부지런하면 아이들 학교 공부시키고 땅섬지기 장만한 사람도 적지 않다.'(현덕, <남생이> 중에서)

개항으로 신문물이 밀려 들어오던 부두는 노동자들에게 삶의 터전이었다. 전국 각지에는 인천에 가면 일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

인천 부두 노동자들은 크고 작은 노동쟁의를 벌였다. 소설 <남생이> 속 아버지도 짐을 나르는 고역에 시달리다가 몸져눕고 만다. 양진채 작가는 "일제 하에서 부두 노동자들 쟁의의 직접적인 원인은 임금 인상이었으나 대우 개선이나 정치적 요구도 포함됐다"고 말했다.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제의 수탈은 극심해졌다. 1934년 당시 만석정 매립지에 일본 동양방적 주식회사 인천공장이 자리잡았고, 인천 곳곳에 군수물자 생산 공장들이 들어섰다. 인천은 '한강 이남 최대 군수공장 지대'였다. 1934년 발표된 강경애의 소설 <인간문제>는 일제를 상대로 한 인천 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을 보여준다.

'인천의 이 새벽만은 노동자의 인천 같다!…차츰 밝아오는 인천의 시가를 걸으면서, 그리고 저 영종섬 뒤로 부옇게 보이는 하늘에 닳는 듯한 수평선을 바라볼 때 용기가 부쩍 나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인천은 '노동의 도시'가 됐다고 양 작가는 설명했다. 주안·부평 등지에는 대규모 공단이 들어섰고, 개항기와 마찬가지로 전국에서 먹고 살려는 노동자들이 밀려들었다.

1970년대 노동 현장을 고발하는 수기 <어느 돌멩이의 외침>에는 부평 공장의 열악했던 노동 조건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어느 돌멩이의 외침>을 쓴 유동우는 1973년 부평공단 섬유 공장에서 일했다. 쉬는 날도 거의 없어 한 달에 두 번 쉬기도 어려웠다. 그는 동료들과 법을 공부하며 노동조합을 만들어 임금 인상과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쳤다. 양 작가는 "주동자로 지목받은 유동우는 시도 때도 없이 부평경찰서에 끌려가 두들겨 맞았다. 그리고 노조 결성 8개월 만에 해고됐다"고 말했다.

1975~1978년 연작 소설로 발표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선 당시 도시 빈민층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아주 쉽게 끝났다'는 철거, '간이 알맞은 무말랭이가 우리의 공장 식탁에 오르기'를 원했던 노동자들의 삶은 '은강'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1883년 개항과 더불어 국제적 무역항으로, 산업도시로 발달한' 소설 속 은강은 인천을 묘사한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됐다. 양 작가는 "그해 7월부터 9월까지 거의 모든 공장에서 '민주노조 건설',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한 파업이 벌어졌다"며 "노동자 대투쟁의 가장 큰 성과는 노동자가 이 사회의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준 인간 선언"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후반 노동소설에는 열악한 노동 현실과 거기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인천의 공단을 배경 삼은 작품들은 민주노조 설립과 회사의 탄압, 노동자들의 분노와 단결 등을 그린다.
'7공단과 8공단 사이를 가로지르고 누운 이 개펄을 사람들을 똥바다라 불렀다. … 똥바다라 이름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이 개펄의 뚝방을 그래도 갈 곳 없는 공단 사람들은 휴식처로 삼았다.'(방현석, <새벽 출정> 중에서)

양 작가는 이날 강연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었다. "지금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는 모든 것들은 선배 노동자들이 흘린 피와 땀, 때로는 죽음을 각오한 싸움으로 얻어졌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투쟁 역시 후배들이 당연히 누릴 권리를 넓히기 위한 노력이다. 그렇게 역사는 전진해왔다. 때로는 조금씩, 때로는 후퇴하는 듯하다가, 때로는 폭발적인 투쟁으로."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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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 속 인천


<인간문제>, 1934년작·강경애

농민운동과 노동쟁의를 정면으로 바라본 작품. 공장 노동자들의 작업 모습, 기숙사 생활 등이 묘사된 후반부는 인천 공장과 부두를 배경으로 삼았다. 일제강점기 방적공장 노동자들의 고달픈 삶과 부두 노동자의 파업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조선의 심장지대인 인천의 이 축항은 전 조선에서 첫손가락에 꼽힐 만큼 그 규모가 크고 또 볼 만한 것이었다. 축항에는 몇천 톤이나 되어 보이는 큰 기선이 뱃전을 부두에 가로 대고 열을 지어 들어서 있었다. … 부두에 빠듯이 둘러선 노동자는 짐짝을 쳐다보며 한층 더 아우성을 쳤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975~1978년·조세희
1975년 발표된 '칼날'을 시작으로 1978년 '에필로그'까지 12편으로 완성된 조세희의 연작 소설. 1970년대 도시 빈민층의 삶과 애환을 다뤘다. 한국 사회가 산업화를 겪으며 직면했던 계층 갈등과 사회적 부조리를 정면으로 접근했다고 평가받는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1883년 개항과 더불어 국제적 무역항으로, 산업도시로 발달한 은강의 역사를 배운다. … 공장지대는 북쪽이다. 수없이 솟은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가 오르고, 공장 안에서는 기계들이 돌아간다. 노동자들이 그곳에서 일한다. 죽은 난장이의 아들딸도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새벽 출정>, 1989년작·방현석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도자기 제조업체의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의 위장폐업에 맞서 벌인 파업투쟁을 다룬 작품. 노동자들이 좌절하고 분노하며 단결하는 모습을 냉정하게 직시하면서도 낙관적으로 풀어냈다.

'미정과 민영은 인천교가 눈에 들어오도록 한 마리의 갈매기도 찾을 수 없었다. 바다가 열리는 서녘 끝으로 개펄을 가로지른 인천교 위로는 차량들이 질주했다. … 민영은 단호하게 마지막 한 마리의 갈매기를 자신이 발견한 숫자에서 제외시켰다.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울 줄 모르는 사람은 노동자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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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채 소설가는
공장 노동자 경험, 작품에 녹여

소설가 양진채는 지난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단편소설 <나스카 라인>으로 등단했다. 2012년 관계의 진정한 소통에 대해 묻는 첫 소설집 <푸른 유리 심장>을 출간했고, 인천의 개항기를 배경으로 무성영화와 사랑을 이야기한 장편소설 <변사기담>(2016), 짧은 소설을 묶은 <달로 간 자전거>(2017)를 썼다.

양진채는 격변의 1980년대를 20대에 관통했다. 당시 세 곳에서 공장 노동자로 생활했다. 지난달 발표한 소설집 <검은 설탕의 시간>에도 그때의 빛깔이 담겨 있다. 1986년 5·3 인천항쟁에 대한 기억이다.

'시민회관 주변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허리에 철사를 감고 있었고 표시가 나지 않도록 헐렁한 셔츠를 입고 있었다. 연행이 두려웠지만 내가 가진 철사가 없으면 연단은 만들 수 없었다.'(단편 '플러싱의 숨 쉬는 돌' 중에서)

양진채는 "5·3 항쟁 때 노동자들이 선두에 서면서 집회가 혼란스러워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며 "1987년 여름 대투쟁을 통한 민주노조운동으로 노동자들의 인간선언이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양진채는 1970년대 인천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장편소설로 구상하고 있다.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