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구 인천석남중교장

마음속에서 이런 말이 새어 나왔다. '그곳엔 왜 갔니?' 그리고는 화들짝 놀랐다. 죽음 앞에 내놓을 말이 아니었다. 1999년 10월30일. 충남 서산 개심사 앞 민박집에서 '인현동 호프집' 사건 소식을 들었다. '새로운 학교에서 밝은 인천을' 만들자고 1년 가까이 인천일보와 캠페인을 펼치던 중이었다.
당시는 학교 붕괴 담론으로 교육 지형이 말이 아닌 때였다. 인천에서라도 교육이 무너지지 않고 있는 모습을 찾고 알려야 했다. 기획을 잘 마무리하자며 서산까지 연찬을 떠났던 교육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어떤 말도 의미를 띨 수 없는 순간에 나는 학생들에게 책임을 씌우고 있었다. '왜 갔니?'라고.
학교마다 몸부림을 치던 시기였다. 차츰 학교와 교실 문화가 달라졌다. 일제식 조회, 감동 없는 졸업식, 학생들이 손님인 축제가 바뀌었다.

학생들은 밤을 수놓는 조명으로 휘황한 축제 풍경을 만들었다. 이웃 학교 축제를 찾아다니며 축제와 축제가 이어지기를 원했다. 학교는 그 변화 앞에서 주춤거렸다. 축제를 마친 야심한 시간대의 생활지도 문제를 논의했다. 여학교와 남학교 축제가 이어질 때 좌불안석이었다.
사회가 반응하는 방식도 엇비슷했다. 축제와 일탈을 한 묶음으로 엮어 미리 경계선부터 그어 놓았다. '너희는 학생이야. 여기까지만.'
학교가 성채로 남으면 무너질수록 속수무책이다. 울타리를 넓히면 무너져도 갈 곳이 남는다. 학교와 인천지역을 잇는 기획에는 학교를 학생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확장해 가자는 뜻이 있었다.

참사 앞에서 질문으로 학생을 찌르기 전에 '그곳'이 학생들에게 어떤 장소인지 물어야 했다.
부끄럽게도 그 질문을 20년 동안 꺼내지 못했다. '그곳=호프집', 세상이 기억해온 방식에 대들지 못했다. 얼마 전에 답을 들었다. "일주일 전 학교 축제로 그 자리에 갔다. 빈자리 없이 가득했던 그곳을 잊지 못한다. 이렇게 좋은 곳을 이제야 알았다니, 자주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 인현동 화재 참사 20주기 특별포럼 발제문 중.
'좋은 곳', 인현동을 재구성해 본다. 학생들은 거기서 무엇을 만났을까. 골목은 학생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친구들과 왁자지껄 서로를 맞아들였을 것이다. 빈자리 없이 가득한 공간은 밀도 높은 소리들로 채워졌을 것이다. 이전에 경험할 수 없었던 문화, 학교 축제 속에 들어있어야 할 요소지만 부족했던 생경함을 만끽했을 것이다.
사람이 북적이고 섞이는 일이야말로 축제를 완성하는 요소다. 학생이 아니라 사람으로 들어올려질 때 경험하는 환대의 느낌에 끌렸을 것이다. 자주 오고 싶을 만큼 좋은 곳, 그곳에 있었던 환대를 어떻게 남길까.
환대는 원래 나그네와 주인이 서로 상대방의 입장이 되는 관계 맺음에서 나왔다. 상대를 영혼까지 깊숙하게 들여다보는 이해 방식이다. 우리는 20년 동안 인현동을 자본의 탐욕과 일탈이 만나 일어났던 참사의 공간으로만 팽개쳐 뒀다.

우리가 학생들이 되는 건 어떨까. 당시 거리를 따라가보면 어떨까. 학생들이 가득했던 2층 호프집에 앉아보면 어떨까. 우리도 그 나이 때 밤거리를 쏘다니고 싶었고, 친구들과 밤 깊도록 떠들고 싶었고, 술 한 잔도 마셔보고 싶었다. 그 어떤 일도 죽음에 이르게 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 저녁쯤은 완전하게 미쳐보고 싶었던 축제의 밤. 우리를 살아있도록 이끌어준 어떤 환대가 인현동에서 축제로 되살아나기를 바란다.

임병구 교장은 인천 송도고, 중앙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인천 명신여고, 인천기계공고, 인천해양과학고, 인천여고, 인천예고 교사를 지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인천지부장, 중앙노동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인천시교육청 정책기획조정관을 거쳐 현재 석남중 교장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