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밭이던 땅에 건물들이 쭉쭉…동네는 변해도 삶은 계속된다
▲ 옥련동 개발이 진행되기 전 1994년 인천시립박물관 인근에서 찍은 사진. /사진제공=인천도시역사관

 

▲ 옥련동 개발의 현재 모습. /사진제공=인천도시역사관

 

▲ 이중녀 완산경로당 회장.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 이명숙씨(맨 오른쪽)가 '옥련동숙이네왕냉면'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인천도시역사관

 

▲ 이영직씨가 운영 중인 '서산카센터'. /사진제공=인천도시역사관


이중녀 완산경로당 회장
'완산이씨 집성촌' 독배마을서 나고 자라 "서울살이 힘들어 친정 왔는데 다 바뀌어"

이명숙 옥련동숙이네왕냉면 사장
선학동 살다 '97년 아파트 분양받아 이사 "올 때만 해도 뻘·공터…지금은 살기 좋아"

이영직 서산카센터 사장
'91년 충남 서산서 이주…공사차량 수리 "바닷가 쪽부터 아파트 들어서 고객 늘어"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킨 송도유원지 때문일까. 언제부턴가 그 일대 옥련동은 '송도'라고 불리웠다.

2011년 송도유원지는 폐장됐지만 송도라는 이름은 여전히 살아 그곳을 맴돌고 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아래 늘어선 음식점과 카페 위치를 말할 때면 송도로 설명된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송도신도시가 세워진 후에 송도유원지는 '구 송도'가 됐다. '신 송도'와 '구 송도'. 인천엔 2개의 송도가 존재하는 셈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구 송도'인지 행정구역상 명시되지도, 정해진 것도 없다. 그저 인천 사람들은 옥련터널부터 옥련동 현대아파트까지가 송도라고 말한다.

송도유원지에서 비롯된 송도라는 이름을 별 이유도 없이 안고 살아온 옥련동 사람들은 그나마도 국제도시 건설로 인해 '옛'것이 되었다. 옥련동 사람들이 생각하는 송도란 무엇일까. 저 다리 너머에 동네 지명을 빼앗겼다고 생각하지는 않을지 얘기를 들어봤다.

# 옥련동 역사 산증인, 완산경로당 이중녀 회장
이중녀 할머니는 1936년 옥련동 독배마을(독배로 90번길 근처)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태어난 집 근처에서 살고 있다. 결혼하고 30여년간 서울로 떠났던 세월을 제외하고는 옥련동을 떠나본 적이 없다.

"소나무가 많은 동네였지. 우리 독배마을이 옥련동에서도 가장 넓고 사람도 많았어요. 대부분이 완산이씨였지. 외지인들은 끼어들기가 어려웠어 다 집안 사람들이니까."

독배마을 앞은 논이나 방죽이었으며 주민들 대다수가 농사를 짓거나 바다에 나가 조개를 캐며 생계를 유지했다.

"학교가 없어서 걸어서 1시간 거리 학익국민학교에 다녔어요." 학교 가는 길은 2가지 였는데, 마차길(옥골로)이라 불리었던 경로와 점말고개로 넘어 가는 길이었다. 마차길은 걷기 좋았지만 조금 돌아가야 했기에, 주로 점말고개 쪽으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이 할머니는 당시 점말고개는 돌이 많아 넘기 힘들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학익동으로 넘어가면 큰 개울(매소홀로)이 있었는데 바닷물이 들고 나가던 개울이었다. 이 개울이 사리 때가 되면 물이 많이 들어와서 오빠들이 업고 건넜다. 그 개울을 피해서 가려면 지금의 홈플러스까지 왔다가 신작로를 따라 들어가야 했는데 거리가 멀어 개울을 건넜다.

한일방직 공장에 다니기도 한 이 할머니는 결혼 이후 옥련동을 떠났다가 1990년대 되돌아왔다. "서울살이 힘들어 그래도 고향이 낫겠지 싶어 친정으로 왔는데 다 바뀌었더라고."

당시는 옥련동 현대아파트가 준공될 즈음이었다. 개발이 본격화 되면서 논도 밭도 모두 사라졌다. "돈 있는 사람들이 집하고 땅하고 죄다 사가더라고. 옥련동 사람은 없었어 다 외지인이 사갔지. 우리 문중도 땅을 많이 넘겼드랬어."

# 옥련동에 들어선 아파트, 그리고 입주자
이명숙씨는 현재 인천 연수구 청량로 185번길 31에 위치한 '옥련동숙이네왕냉면' 주인이다. 원래 경기도 일산 출신으로, 결혼해 선학동에 살다가 1997년도 3월 옥련동으로 이사를 왔다. 냉면집은 2002년부터 시작했다.

"남편이 삼성아파트 분양광고를 보고 이사 한 번 가보자고 했죠. 당시 분양가가 24평에 5300만원이었어요. 이사 올 때만 해도 삼성아파트 주변은 뻘이나 흙을 쌓아놓은 공터였죠. 슈퍼 하나 없었고 옆 럭키아파트 앞까지 차가 들어오지도 못하는 길이었어요."

친정을 갈 때는 마을버스 타고 동인천역으로 가서, 다시 전철타고 서울로 이동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아파트가 하나둘씩 지어지면서 편의시설도 들어섰다. 도로가 뚫렸고 옥련동은 1동과 2동으로 분리됐다. "지금은 살기 좋죠. 병원이나 은행도 많고 옥련시장이 있어서 장 보기도 편해요."

아파트가 막 들어설 때는 학교가 송도초등학교 밖에 없었지만, 점차 공동주택이 늘어나며 능허대초등학교가 먼저, 그 다음으로 옥련초등학교가 개교했다.

"우리 큰 아들이 능허대초등학교로 들어갔을 때에는 오전반과 오후반이 나뉘어 있었어요. 옥련초등학교와 축현초등학교가 자리 잡으면서 학생들이 분산됐죠." 특히 능허대초등학교는 옥련1동, 옥련초등학교는 옥련2동에서 주로 다녔다. 당시 능허대초등학교에 한 반 당 42~43명이 있을 정도로 과밀이었다.

"옥련동인데 그냥 편하게 송도라고 해도 다 알아들었어요. 사람 인심 좋고 정이 있는 동네죠. 원래 송도가 그런 곳인데 저쪽 송도는 사람 냄새가 안나는 거 같아요. 삭막하고 사람 사는 데라기보다는 투자 분위기 아닌가요? 전 여기가 좋아요."

# 옥련동 개발 지켜본 카센터 사장님
아파트 옆으로 20년된 카센터가 있다.
이 곳 운영자인 이영직(53)씨는 1991년 충남 서산에서 연수구 옥련동 영남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도화동에 살았던 숙부의 영향을 받아서였다.

"오자마자 이듬해 사업자 등록을 했습니다. 이 주변이 죄다 전답이었어요. 겨울엔 연탄재 쌓아두고는 했죠."

이씨의 '서산카센터' 주 고객은 벽돌공장을 오가는 트럭과 옥련동 주변 개발지역의 공사차량 등이었다. "현장 왔다갔다 하면서 트럭에 잔고장 나고 하면 우리 가게로 왔지요."

"예전엔 송도역에 시장이 있었는데 거기 자주 갔던 기억이 나요. 그 시장 안에 한림의원이라고 있었는데 이 동네 사람들 아프면 잘 가던 곳이에요." 교통은 동인천 쪽으로 나가는 6번, 11번밖에 없었고 외지로 나갈 때도 이 버스만 이용했다.

1994년부터 아파트가 들어섰다. 동네가 급격히 변했고 달라졌다.

"바닷가 쪽부터 럭키아파트, 윤성아파트 등이 지어지대요. 역시 새 아파트 들어오는 사람들은 자차 소유자가 많아서 덕분에 카센터에 고객도 늘었어요."

수인선 협궤철도가 사라졌다가 복선화되고 전답이었던 곳들에 대거 아파트가 들어선 것이 이 씨의 기억이다.
"90년대 같이 지냈던 동네 사람들이 많이 옥련동을 떠났어요. 송도신도시로 간 사람들도 있고요. 그래도 장사하고 생활하는 것은 예전보다 훨씬 편해지고 좋아졌네요."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인천일보·인천도시역사관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