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는데 이른 아침 아내가 배춧국을 끓인다 배추는 이른 아침부터 불려 나와 끓는 물속에서 몸을 데치고 있다 배추는 무슨 죄인가 배추는 술담배도 안 하고 정직하게 자라났을 뿐인데 배추에 눈망울이 있었다면 아내가 쉽게 배춧국을 끓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래 나도 눈망울을 갖자 슬픈 눈망울 그러면 이른 아침부터 불려 나가 몸이 데쳐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렁그렁 소 같은 눈망울로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나를 어쩔 것인가 아, 하나의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꼭 오늘 아침은 아니지만 우리가 가끔 먹는 동탯국 머리째 눈망울째 고아내는 시뻘건 그 국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 이불 속에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풍자와 해학이 돋보이는 시이다. 웃기면서도 슬프다. 시의 화자는 지금 '이불 속'에 있다. 이불 속이라. 적어도 나에게 '이불 속'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이었다. 이불 속의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고 온전히 자유로운 나로 있고 싶은 순간이다. 이불 속과 이불 밖은 너무나 대비되기 때문이다. 이불 밖으로 나온다는 것은 세상에 내던져진다는 것, 곧 실존(existence)의 순간에 있게 된다는 것,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결코 가볍지 않다.
시인은, 배춧국과 동탯국의 대비를 통해 선택의 기로에 선 인간의 실존의 문제를 건드린다. 이때 선택은 내 삶의 주체가 되느냐 아니면 상황에 구속된 존재가 되느냐의 선택이다. 물론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우리를 구속시키고 억압한다. 이불 밖으로 나온 이상 우리는 이런 억압과 구속을 피할 수 없다. 라깡은 이런 강요된 선택을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설명한 바 있다. 주인과 노예는 목숨을 건 투쟁을 하게 되고, 이 투쟁에서 노예가 될 자는 자유와 목숨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될 운명에 놓이게 된다. 그가 자유를 선택한다면 그는 자유와 목숨을 둘 다 잃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삶을 선택하게 되고, 그 대가로 그는 자유를 상실한 삶, 즉 노예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것이 현실이다. 이 시에서 화자가 배추나 동태처럼 장렬히 전사하지 못하고 이불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이다.
중요한 것은 역시 '웃음'이다. 데리다는 "웃음은 의미에 대한 절대적 포기에서 터져나온다"라고 말한다. 이 시가 웃기면서도 짠하게 읽히는 것은, 그 웃음이 바로 이런 '절대적 포기'에서 터져나오기 때문이다. 실존적 고뇌가 환기하는 절망감이 해학을 낳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해학은 삶과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때에 가능하다. 고통스런 현실에 웃음마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우스꽝스러움이 때로 우리 삶에서 신선한 자유를 환기한다. 여담이지만, 박순원 시인은 유달리 눈이 크다. 이 시를 읽는 순간에도 그렁그렁 소 같은 그의 눈망울이 떠오른다. 적어도 박순원 시인은 이불 밖으로 불려나가도 되지 않을 확실한 방법 하나는 가지고 있는 셈이다. 얼마나 행복한가. 부럽다. /강동우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