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규 인천내리교회 목사

벌써 몇 달이 지났지만 잊히지 않는다. 아내와 함께 나들이를 하고자 차를 몰고 집근처에 있는 홍예문 터널을 들어가려는데 앞쪽에서 차가 오는 바람에 약간 뒤로 후진하게 됐다. 뭔가 툭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있었지만 워낙 경미해서 신경을 쓰지 않다가 조수석의 아내가 뒤차를 박은 것 같다고 해서 차문을 열고 나와 보니 택시와 가벼운 접촉사고가 났다. 순간 당황해서 내 차 뒤 범퍼와 상대편 차 앞 범퍼를 살펴보니 내 차에만 약간의 자국이 났을 뿐 비교적 오래된 택시의 번호판을 비롯한 범퍼에는 어떤 흠집도 보이지 않았다.
내심 안심하고 택시 쪽으로 가서 사과를 하려는데 기사가 한참 동안 나오지를 않다가 거듭 문을 두드리자 나와서 고개를 돌리며 마치 크게 다친 시늉을 하기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다를까 흠집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데 어디서 생겼는지 알 수 없는 몇 가닥 스크래치를 연신 가리키며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어쨌든 차를 들이박은 사람은 나이기에 죄인 된 심정으로 계속 사과를 했지만 상대는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속으로 한 10만원만 드리면 합의가 될 것 같아 손해배상으로 얼마를 드리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최소한 50만원은 줘야 된다는 매우 착잡한 대답이 돌아왔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수용할 수 없는 요구였기에 즉각 보험사에 전화를 했더니 30여분 후에 젊은 직원이 나타났다.

자초지종을 직원에게 설명하고 중간에서 합리적인 해결을 해줄 것을 부탁했더니 내 차와 상대편 차를 먼저 살피더니 조정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으레 보험사만 믿고 빨리 사고현장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사태는 점점 더 꼬이기 시작했다.

상대편이 병원에 가겠다고 드러눕는다면서 내가 억울한 일 당했지만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으려면 시간을 많이 써야 하고 이런 경우 피해자가 병원에 가고 진단서를 끊고 치료비를 요구하면 가해자는 꼼짝없이 당해야 하니 이런 작은 사고로 시간 낭비하고 신경 쓰고 보험 할증료까지 올라가는 것은 고객에게 손해가 될 뿐, 그냥 50만원을 주고 끝내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순간 "아,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정의롭고 합리적인 해법은 소용없겠구나!"하는 절망감이 찾아왔다. 더욱이 가벼운 사고든 무거운 사고든 내가 '가해자'라는 이름을 뒤집어쓸 때부터는 보험사도 경찰서도, 병원도 공정한 해결책을 위해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체념이 들었다.
억울하고 화난 마음을 지금 무척 객관화시켜서 차분하게 분석하고 글을 쓴다고는 하나, '눈을 뜨고서도 코를 베어가는 세상'을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배웠다는 자괴감을 지울 수 없다.
문득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시구가 떠오른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시인의 말처럼 나같이 왜소한 소시민은 '조국사퇴'니 '검찰개혁'이니 무슨 대단한 국사 때문에 분개하기보다는, 이런 자질구레한 억울한 일에 더 분개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은 "하루살이를 걸러내면서 낙타는 통째로 삼킨다"(마 23:24)고 말씀하셨다. 하루살이처럼 사소한 문제는 중요하게 여기고, 낙타와 같이 중대한 문제는 사소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검찰개혁', '남북화해' 등등 국가 현안이 다 중요하겠지만, 누가 보더라도 가당치 않은 일을 눈뜨고 당하지 않는 그런 도덕적이고 정직한 일상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요컨대 정부와 정치가 일개 소시민의 분개를 일축하지 않고 아주 사소한 문제 때문에 혀를 차고 속상해 하는 이들이 후련하게 살 수 있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세상을 만들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김흥규 목사는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주 남감리교대학교(Southern Methodist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텍사스 성루가연합감리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했다. 현재 영화학원 이사장이며, 연세대 국제캠퍼스에서 '기독교의 이해' 과목을 강의한다. <로마서 강해 1, 2> 등 수십편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