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시기의 바다는 두려움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는 육지에서의 부단한 이동과 영역의 확장에서 일어나는 필연이기도 하다. 고대로부터 인류는 육지에서 바다를 거쳐 섬으로 이동했고, 섬에서 바다를 건너 또 다른 육지로 이동했다. 인류는 모험과 정복, 정주와 이동을 되풀이하며 점차 바다를 이해하고 이를 삶의 터전으로 가꿨다.
고대의 동서교역은 대부분 육로를 통하여 이뤄졌다. 이는 초원과 사막을 건너는 험한 길이었다. 교통수단도 말과 낙타가 안성맞춤이었다. 중국이 실크로드인 서역에서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육상교역은 점차 감소되고 해상운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는 그동안 축적된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전과도 맞아 떨어졌다.
또한, 바다로 이동하는 것이 육지보다 훨씬 유용했다. 파손이나 도적에게 빼앗길 염려도 적었다. 무엇보다도 한꺼번에 많은 물량을 신속하고 안전하게 운송할 수 있는 이점 때문이기도 하였다. 특히, 도자기나 원목 등 무겁고 깨지기 쉬운 것들은 배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었다. 본격적인 해상실크로드 시기가 된 것이다.
한반도와 중국은 고대부터 황해를 왕래하며 교역하였다. 이는 신석기시대부터 이루어졌는데 최초의 기록은 <관자(管子)>에 보인다. 이 책은 기원전 7세기의 인물인 관중(管仲)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관자가 제나라 환공이 궁금해 하는 7가지 '옥폐(玉幣)'를 알려주는 부분에 세 번째로 등장하는 것이 '발조선(發朝鮮)의 문피(文皮)'이다. '문피'는 호랑이나 표범 가죽을 말한다. 고대에도 문피는 귀한 보물이었으며 고조선의 것을 최고로 인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나라는 산동성에 위치하였고 고조선은 보하이(渤海)만과 랴우둥(遼東)반도 위쪽에 있었다. 두 나라가 이러한 특산품을 교역하기 위해서는 바닷길을 이용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두 나라가 상호 왕래한 바닷길은 보하이만을 따라가는 발해항로(渤海航路)였다. 이는 육지를 따라 가는 연안항로로 조선술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는 가장 안전한 항로였다.
고대의 황해를 오가는 항로의 동서기점은 어디였을까. 이를 문헌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당나라 때 가탐(賈耽)이 지은 <도리기(道里記)> 중 '등주해행입고려발해도(登州海行入高麗渤海道)'이다. 이곳의 항로를 따라가보면 그 출발점은 산둥반도의 등저우(登州)다. 이곳에서 랴우둥반도를 따라 압록강 어귀에 이르고 한반도의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온다. 옹진반도와 경기만을 거쳐 당은포에 이른다. 황해를 오가는 항로의 동서기점은 등저우와 당은포인 것이다. 당은포는 삼국시대까지 주요한 기점이었다. 하지만 고려가 건국되고 수도가 개성으로 이전하면서 예성강의 벽란도가 새로운 기점이 되었다.
황해를 오가는 바닷길은 사신길이나 무역길뿐 아니라 침공길이 되기도 했다. 기원전 109년에 한 무제의 명령을 받은 누선장군 양복(楊僕)이 이 항로를 따라 수군을 이끌고 고조선을 공격하였고,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와 전쟁을 할 때에도 이 항로를 따라서 침공하였다.
황해북부 연안항로는 5, 6세기부터 점차 경색되어갔다. 중국에서는 남북조의 대립이 격렬해지고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간의 치열한 전쟁 때문이었다. 황해 북부항로는 산둥반도 근해를 장악한 북위와 한반도 근해를 장악한 고구려는 각기 자국의 영역을 막고 적국의 선박을 나포하자 항로로서의 기능이 불가능해졌다. 백제가 남제(南齊)에 사신을 보낼 때에나, 신라가 당에 사신을 보낼 때 고구려가 바닷길을 막았다. 648년, 나당군사동맹을 성사시키고 귀국하던 김춘추가 고구려 순라군(巡邏軍)에 쫓겨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일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백제와 신라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황해중부 횡단항로가 개척되었다. 이 항로는 황해도의 서남단에서 산둥반도 성산(成山)까지 직선으로 황해를 가르는 항로다. 이 항로는 연안과 원양으로 이뤄진 항로다. 연안은 덕적도와 강화도, 교동도 등을 거쳐 옹진반도에 이르고, 이곳에서 산둥반도까지 가로지르는 것이다. 백제의 사신길인 인천의 능허대도 이 항로를 따라 가는 출발점이었다. 이 항로는 백제나 신라가 사용하기는 했지만 7세기 초까지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황해중부 횡단항로는 사신길이기도 했지만 침공길로의 활용이 많았다. 660년 당나라의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이 항로를 따라 진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소정방이 이 항로를 선택한 것은 신라가 세세한 정보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군사를 지원받기 위해 당나라로 간 김인문은 고종에게 백제의 도로와 진공로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자신도 '신구도부대총관(神丘道副大摠官)'이 되어 소정방을 안내했다. 이로보아 황해중부 횡단항로는 당시에 상용화된 항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제보다는 신라가 이용에 성공함으로써 이후 신라인들이 대거 왕래하는 항로가 되었다. 이 항로는 이후 안전한 항로로 정착되어 고려, 조선시대에도 널리 활용되었다.
8세기 중반, 번영을 구가하던 당제국은 10년간 지속된 안사의 난으로 북방지역의 사회와 경제가 매우 불안했다. 하지만 강남 연해지역의 도시들은 이를 기회로 호황을 누렸다. 특히, 창강(長江) 하구에 있는 도시들은 국제무역항으로 발전했다. 강남의 도시와 항구가 발전하자 황해를 통한 무역과 교류도 강남으로 이동했다. 신라와 고려도 강남으로 통하는 새로운 바닷길을 개척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필요성은 한반도에서 남중국으로 직접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결과 황해남부 사단항로(斜斷航路)가 연결되었다. 이 항로가 일반화된 것은 고려시대인 11세기 중반 이후다. 고려는 벽란도와 명주(明州;현 닝보寧波)를 오가며 송과 활발히 교류했다. <고려도경>을 지은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도 이 항로를 통해 고려를 오갔다. 사단항로는 황해를 횡단하는 항로 중 가장 빠른 항로였다. 순풍을 만나면 4~6일이면 충분했다.
신라인들은 중국과의 빈번한 왕래 속에서 점차로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초기에는 연해안 항로를 이용하였지만, 장보고와 그 후예들은 황해를 횡단하거나 남중국해로 직접 내려가는 남방항로를 개발했다. 지금도 중국 절강성 닝보(寧波)와 타이저우(台州) 등지에는 신라인들의 활동사항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들이 있다.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는 아랍상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고,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는 국제무역항으로 번창했다. 고려인들은 취안저우(泉州)와 항저우(杭州) 등 중국의 강남지역으로도 진출하여 정치, 종교, 예술과 학문 등에 이르기까지 수준 높은 교류를 하며, 멀리 페르시아까지 교역을 확장했다. 또한, 고려인들은 독창적인 고려청자를 빚어내며 해상실크로드를 한반도까지 연결했다. 중국의 강남지역에서 만나는 고려청자와 관련 유적들은 고려의 위상과 고려인의 자긍심을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유산들이다.
/허우범 작가 appolo21@hanmail.net
/이희환 박사 Lhh400@hanmail.net
/장정구 위원장 namukkun@greenkorea.org
/남창섭 기자 csnam@incheonilbo.com
/이주영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김은희 기자 haru@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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