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연 인천광역시의료원장

 

얼마 전 태풍 링링과 미탁이 한반도를 지나가며 많은 사상자와 이재민, 엄청난 재산피해를 냈다. 2005년 늦여름, 미국 남동부에서 발생한 초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기억한다. 세계대공황 이후 국가 주도의 복지국가를 추구하던 수정자본주의의 물결이 퇴조하면서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대처 영국 수상(1979~1990)과 레이건 미국 대통령(1981~1989)을 앞세워 모든 공공부문을 민영화하고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는 정책을 지향했다.

우유회사부터 공항·철도까지, 응급구조대부터 교도소까지 대부분 공공부문을 민간에 매각했다. 강력한 비바람에 모든 것이 사라지는 천재지변 앞에서 시민들은 '정부' 없이 재난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수천의 사망자와 수백만의 이재민을 낸 천재지변 앞에 관리능력을 잃은 무기력한 정부에 실망해 2009년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당선된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공공성의 상실은 위험사회로 가는 길이다. 모든 시민이 안심하고 일하고 안락한 집에서 자녀를 키우고 질병과 노후에 대한 걱정 없이 사는 사회는 우리가 꿈꾸는 행복한 복지사회이다.
복지수준의 척도는 바로 공공성의 크기이다. 공공성이 가장 필요한 분야는 주택, 교육과 의료라고 볼 수 있다. 생존에 필수적인 분야를 이윤을 추구하는 사적 영역에만 맡겨서는 불평등과 양극화의 심화로 국가사회의 존립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공공부문의 비중은 한결같이 OECD 평균을 한참 밑돈다. 최근의 통계를 보아도 공공임대주택 6.8%, 공공어린이집과 유치원은 21.1%로 비교 가능한 선진국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특히 대부분 60%를 훨씬 웃도는 공공병원 비중은 5.4%로 OECD국가 중 가장 비중이 낮은 일본이나 미국의 1/5 수준에 불과하다.
대부분 나라의 보건의료제도는 공공의료(병원)가 중심이고 민간은 공공이 굳이 나설 필요가 없는 부분을 맡는다.
우리나라의 공공병원은 존재감이 없을 정도로 빈약하다. 왜 이런 기형적 구조를 갖게 되었을까. 일차적인 원인은 일본제국주의의 영향에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 중반, 메이지유신을 통한 개화와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일본은 유럽(특히 독일)의 공공의료제도를 도입하려 했었다. 그러나 일본 왕과 막부 간 최후의 전투(세이난 전쟁)에서 금고가 빈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사적 자본에 의존하는 민간 중심의 보건의료체계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제국주의 침탈 과정에서 우리나라와 대만 등 일제 식민지를 겪은 나라들에도 똑같은 민간 중심의 의료제도가 정착되는 비운의 역사를 밟는다. 하지만 그런 일본도 꾸준한 노력을 통해 지금은 25% 이상이 공공병원이며, 그 규모 또한 민간 대형병원과 비견된다.

우리나라 제2의 도시로 발돋움하는 인천광역시의 공공의료 비중과 수준은 광역단체 중 최하위 수준이다. 지역주민의 필수 의료를 담당해야 하는 거점 공공병원은 불과 2개, 이마저도 외곽에 위치하여 접근이 어렵거나 만성 재정적자로 최소한 시설만 겨우 운영하는 상황이다. 서울 면적의 2배에 육박하면서 국립대학병원도 없다. 2019년 인천시 공공보건의료지원단의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인천의 인구 당 의료인력, 병상 수 등은 광역단체 중 꼴찌에 가깝고, 타 도시로 나가 치료 받는 환자의 비율 또한 가장 높다. 인천시가 가진 흡연율·비만율·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비율 전국 1위, 고위험 음주율과 자살률 2위의 기록은 인천시의 취약한 공공의료 환경을 볼 때 피치 못할 결과라 볼 수 있다.

인천시민을 괴롭히는 붉은 수돗물 사태, 아프리카돼지열병도 결국은 공중보건과 건강의 문제가 아닌가. 메르스가 전국을 휩쓴 다음에야 감염병 예방의 필요성을 알고 열 배, 스무 배의 고통을 치렀듯 수많은 소를 잃고야 외양간을 고치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하겠다.
지난해 발표한 정부의 '공공보건의료발전 종합대책'은 인천시에 적어도 4개의 인천의료원급 종합병원의 설치 또는 지정 필요성을 밝힌 바 있다. 수준 높은 도시의 필수조건인 공공성을 갖춘 의료안전망을 조금이나마 개선하는 데 공공병원 확대는 기본조건이다.

희소식이 들려왔다. 인천시가 제2 인천의료원 설립계획을 공표했다. 2026년까지 500병상 시립 공공병원을 설립한다고 한다. 공공병원 설립은 길고도 어려운 길이다. 시민의 수십 년 열망에 부응하도록 튼튼하면서도 잰걸음으로 멋진 공공병원을 만드는 길에 적극 나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조승연 원장은 서울대 의과대학 의학과를 졸업하고, 충북대 의과대학원에서 외과학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가천의대 교수, 인천적십자병원 원장, 인천광역시의료원 13대 원장을 거쳐 현재 15대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