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계 병원, 임대료 2천300만→1억5천만원으로 7배 인상
소송서 병원 측 손들어준 법원 "22일까지 가게 비워라" 명령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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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의 명소 '스페인 계단'을 찾은 관광객이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곳이 있다.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라는 타이틀을 지닌 '카페 그레코'(Caffe Greco)다.

1760년 문을 연 이 유서 깊은 카페는 그동안 괴테, 스탕달, 찰스 디킨스, 안데르센 등 세계적인 문인과 음악가, 극작가, 지식인이 '만남의 장소'로 즐겨 찾던 곳이다.

오랜 세월을 간직한 고풍스러운 분위기 속에 300여개의 미술 작품이 소장돼 미술관 같은 분위기도 풍긴다.

카페 자체가 관광 명소가 돼 일부러 이곳까지 찾아와 선 채로 한잔에 1.5∼1.7유로(약 2천∼2천200원) 하는 에스프레소·카푸치노 등을 마시는 관광객이 셀 수 없을 정도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정치적 격변, 경제 침체 등을 견뎌내며 300년 가까이 꿋꿋하게 명맥을 이어온 이 카페가 임대인과 뜻하지 않은 분쟁에 휘말려 문을 닫을 위기에 놓였다.

19일(현지시간) ANSA 통신 등 현지 언론과 영국 일간 가디언 등에 따르면 이 분쟁은 지난 2017년 9월 시작됐다.

당시 임대차 계약이 만료되자 임대인인 이스라엘계 민간 병원이 월 임대료를 기존 1만8천유로(약 2천300만원)에서 12만유로(약 1억5천800만원)로 올린 것이다. 무려 7배에 가까운 '월세 폭탄'이었다.

카페 그레코가 상식에 어긋나는 임대료 인상이라며 이스라엘계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결과는 패소였다. 법원은 카페 측에 오는 22일까지 가게를 비우라고 명령했다.

2000년 카페 그레코를 인수해 19년째 경영해온 카를로 펠레그리니는 "법원 판결을 이해할 수 없다"며 "임대료 인상액이 터무니없다. 카페 운영을 계속하고자 이전보다 더 많은 임대료를 낼 준비가 돼 있지만 6배 이상은 지나치다"고 하소연했다.

문화유산 보호단체인 '이탈리아 노스트라'(우리 이탈리아)도 카페 그레코를 지원하고 나섰다.

이 단체 로마지부 부지부장인 반나 만누치는 "카페 그레코가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로마시민과 관광객들의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생각은 정말 견딜 수 없다"며 "누가 얼마나 돈을 버는지는 관심 없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이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장소가 유지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분쟁을 촉발한 이스라엘계 병원은 로마에만 3곳의 의료시설을 보유한 곳으로, 이탈리아의 공공 의료 시스템 내에서 운영되는 몇 안 되는 민간병원 가운데 하나다.

이 병원은 약 80년 전 카페 그레코 입점 부지 건물을 상속받아 지금까지 임대료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카페 그레코는 그동안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지만, 병원 측과 큰 분쟁 없이 공존해왔다.

현지에서는 프랑스계 명품 브랜드 몽클레르가 카페 인수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카페 그레코가 위치한 비아 콘도티(Via Condotti)는 몽클레르를 비롯해 루이비통, 샤넬, 구찌 등 명품 가게가 즐비한 로마의 쇼핑 중심지다.

병원 측은 일단 카페가 폐업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병원 측 대변인인 파비오 페루자는 "카페 그레코는 250년간 그 자리에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며 "새로운 주인이 들어오는 것일 뿐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해명했다.

또 "임대료 인상은 시장 가격에 맞춘 것이며 해당 수익은 병원에 투자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는 "인상된 임대료를 기꺼이 지불하려는 많은 잠재적 인수자들이 있다"면서도 인수 희망자가 누구인지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펠레그리니와 이탈리아 노스트라는 법원이 퇴거를 명령한 22일 전까지 정부가 개입해 해법을 찾아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관련 부처인 이탈리아 문화부 측은 "카페 그레코는 현재의 역사적인 장소를 그대로 유지해야 하며 다른 업종으로의 변경은 불가능하다"면서 "카페 그레코와 관련한 기존의 제한 규정을 보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탈리아 정부는 지난 1953년 7월 카페 그레코를 '로마 특별 중요 유산'으로 지정해 보존·관리해왔다. 관련 규정에 따라 내·외부 인테리어 구조 변경은 엄격하게 규제된다.

카페의 완전한 폐업은 피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법원의 퇴거 명령이 집행되면 일시적 영업 중단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카페에서 일하는 40명 안팎의 종업원도 해고 위기에 놓이게 될 것으로 보인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