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서철 불야성 이루던 곳, 이젠 빛바랜 추억만 남아
▲ 1960년대 송도해수욕장 항공사진. /사진제공=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 1960년대 아암도의 모습. /사진제공=전순용

 

▲ 1981년 송도유원지 정문. /사진제공=유원복

 

▲ 1989년 송도해수욕장. /사진제공=유원복

 

▲ 송도유원지에서 진행했던 전통혼례식. /사진제공=인천도시관광주식회사

 

▲ 1990년대 송도해수욕장 전경. /사진제공=인천도시관광주식회사

 

▲ 경북마트로 이름을 바꾼 경북상회의 현재 모습. /사진제공=인천도시역사관


"1960~70년대 요금 1000~2000원"
"밖은 한적…구멍가게 하나만 있어"

"1990년대 성수기엔 24시간 개방도"
"인천서 '놀이기구' 탈 수 있어 인기"

"군부대 있던 곳…1963년 개발 시작"
"한여름 수박·아이스크림 많이 팔아"


일제강점기 그들의 유흥을 위해 인천에 세운 송도유원지. 소나무가 많았던 것도, 섬도 아니었으나 '松島'라는 이름이 붙어버린 모순의 상징.

이후에도 폐장과 개장을 반복하며 한 많은 인생을 살았던 송도는 이제 송도 국제도시라는 이름으로 다리 건너 지역에 이름을 나눠 갖기도 했다.

지금까지 인천도시역사관과 인천일보는 공동 기획을 통해 없었던 섬이 2개의 송도가 되기까지 역사와 의미를 짚었다.

이제 송도를 둘러싸고 그곳을 살아냈던 이들의 입을 빌려 생생한 이야기를 듣는다. '구 송도'와 '신 송도'로 분류되는 송도에 살았던 이들,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과거를 되돌아보고 송도의 미래를 논하고자 한다.

여러 기관의 도움을 받아 인터뷰 대상자를 섭외했으며 특별히 실명을 원치 않을 경우에 한해 익명처리 했다.

#송도유원지 재개장 산 증인
송도유원지는 문을 닫았다가 곡절을 겪고 1963년 재개장했다. 1967년부터 1977년까지 인천도시관광주식회사에서 근무했던 A(96)씨는 이때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흥한재단의 이사장이었던 박흥식 사장과 인천시가 다시 문을 열자고 앞장섰죠. 그때 입장료가 1000~2000원 사이였어요. 사무직과 외근직, 매표소 직원과 경비 등등 해서 30~40명이 근무했으니 사람들도 다시 뽑았더랬죠."

당시 박흥식 사장이 용현동에 소유하고 있던 땅을 군용지였던 송도유원지의 땅과 교환한 기록이 A씨의 기억을 받쳐 주고 있다.

"송도유원지 안에 유류창이 있었는데, 용현동으로 이전했고 인천시가 박봉자라는 이의 땅을 농지개혁법으로 수용해 출자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A씨가 근무하던 당시 송도유원지는 탈의장과 샤워장, 매점, 식당 등의 시설을 갖췄다. 사무직은 총 10명 내외가 근무하였으며, 외근직으로 매표소 직원과 경비 20명 정도가 함께 일했다.

"화려했던 송도유원지 내부에 비해 그 밖은 한적했어요. 유원지 앞에 자그마한 구멍가게만 하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990년대 화려했던 송도유원지
유원지 직원이었던 B(46)씨 역시 지인의 소개를 받아 1990년대 인천도시관광주식회사에서 일했다. 당시 인천도시관광주식회사는 영업부, 관리부, 경리직, 경비직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B씨는 영업부 소속으로 매표소에서 매표와 관련된 일을 했다. 인원은 모두 포함하여 30~40명가량이었다. 내부시설은 회사가 직접 관리하는 직영 시설과, 외부에서 임대로 들어와 수익활동을 했던 위탁 시설로 운영됐다.

B씨는 영업부가 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하며 동문, 정문, 서문 3개소에서 매표를 책임졌다고 말했다. 직영 시설의 매표도 담당했다. 특히 출입문 매표의 경우 3개 부스의 매표소를 항시 전부 개방한 것은 아니고, 출입 인원에 맞게 유동적으로 개방했다.

"마감할 때 수불장부를 통해 일일정산을 한 뒤 매표 수익을 경리부로 전달했습니다. 단체 관광객의 예약을 전담했고 미아나 단체 집합 시간 등을 전달하는 장내 방송도 제 일이었어요."

경비직은 주로 3~4명씩 출입문에 상주하며 입장표와 재출입 여부를 확인했으며, 야간 개장 때는 매표도 담당했다. 관리부는 유원지의 전체적인 운영을 맡았으며 위탁업자들과의 임대료 조율이나 위탁업소 위생 관리 등도 했다.

B씨에 따르면 송도유원지에 소규모 동물원도 있었다. 직원들은 동물원 관리와 해수욕장을 청소하는 일도 했다고 한다.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휴가철에는 여러 부서들이 총동원해서 매표를 돕기도 했다.

"현재 송도 골프장 인근인 유원지 동문쪽에 큰 주차장이 있었고 관광객들이 버스 정류장이 있는 정문으로 가장 많이 들어왔어요. 내부에는 해수욕장, 놀이기구, 관람차, 소규모 동물원, 음식점, 매점, 풀장, 보트체험, 오리배, 간이천막, 야외결혼식장, 공연장, 운동장 등이 있었는데 해수욕장, 보트체험, 오리배 등 수상 레저의 경우 여름철에 수상 요원들이 상주했으며 해경들도 지원 나오곤 했지요."

해변가 쪽은 주로 번데기 같은 분식을 많이 팔았고, 보트를 타던 해안 뒤쪽으로는 비교적 비싼 음식점이 있었다고 말했다.

"유원지에서 최고 인기였던 놀이기구는 '뮤직 익스프레스'였어요. 문어다리 모양의 놀이기구와 바이킹도 많이 탔죠."

간이 천막의 경우 해변가에 쳐놓고 별다른 예약이나 지정석 없이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야외 결혼식장은 전통혼례식 등이 이뤄졌던 곳으로 위탁 음식점에서 관리했다.

B씨는 공연장이나 운동장 등은 회사 야유회나 학교 소풍, 체육대회로 많이 이용된 것으로 회상했다. 앞바다에는 무인도인 '아암도'가 있어서 썰물 때 물이 빠지면 목재로 제작된 길을 통해 들어갔다 나왔다.

송도유원지가 놀이기구를 중단한 이후 눈썰매장이나 자동차 극장 등이 신설되기도 했다.

"유원지 내에서 술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어요. 관광객들은 대부분 유원지 내의 매점이나 음식점에서 식사를 해결하거나, 취사도 했지요. 음주 제한이 없어서 크고 작은 말썽도 생기긴 했지만요."

봄과 가을은 소풍이나 야유회철이라서 단체 손님이 많았고 여름에는 해수욕과 캠핑 등을 즐길 수 있던 송도유원지는 성수기에 24시간 개방이라는 파격적인 운영을 하기도 했다.

반면 겨울은 다른 계절에 비해 한가했다고 하며, 성수기와 비수기 간에 차이가 컸다고 B씨는 말했다.

"인천에서 놀이기구를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었으니 인기가 많았죠. 에버랜드의 전신인 자연농원은 너무 멀어서 인천 사람들은 잘 못 갔어요. 물이 더럽다는 인식은 있었지만 모객에는 별로 지장이 없었죠. 송도유원지는 관광비는 다소 비싼 편이라서 그래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 이용하곤 했지요."

#그곳 앞, 경북상회
A씨의 기억처럼 송도유원지 앞에는 '경북상회'라는 소규모 점포가 한 개 있었다. 놀랍게도 이 상회는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그것도 2대에 걸쳐 여전히 예전 운영자의 아들이 경영하고 있다.

최도상(64)씨가 바로 지금의 경북상회 사장이다. 부모님 때부터 옥련동 토박이로 살아온 그는 60년째 상회를 이어온 만큼 송도유원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경상북도 김천 출신이기 때문에 가게의 이름을 경북상회라고 지었죠. 처음 송도유원지는 군부대였던 걸로 기억이나요. 영국의 군부대가 하나 있었고, 파출소가 있던 자리에 한국군의 유류창이 있었거든요."

최 씨는 그러던 어느 날 유류창이 용현동으로 이전해 가면서 송도유원지의 개발이 시작됐다고 회상했다. 그 시기를 대략 1963년으로 기억하고 있다. 송도유원지의 개발이 시작되면서 송도로터리를 버스정류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유원지 정문 우측에 큰 수영장이 하나 있었죠. 왼쪽에는 보트장이 있었고…. 해수욕장 물이 검고 흐렸어요. 보트장에 뱀장어나 굴도 있었지 아마."

실제 송도해수욕장은 바다에서 물을 끌어와 침전시켰기 때문에 물이 탁했다.

송도유원지가 가장 붐비는 여름철이면 경북상회도 바빠졌다. 매년 8월 중순쯤 더위가 한창일 때 사람들이 몰렸는데 강릉이나 대천 등 유명 피서지로 여름 휴가를 다녀오고 여름이 가기 전 마지막으로 수영하러 오는 이들이 많았다고 했다.

"비닐 튜브나 수영복과 같은 수영용품을 항상 가져다 놓았죠. 수박이나 아이스크림 같이 더위를 쫓을 수 있는 주전부리가 많이 팔렸어요. 송도유원지 내부에도 매점이 있었는데 우리 가게에서도 많이 사갔어요."

송도유원지가 더 이상 영업하지 않는 지금의 경북상회는 어떨까.

최도상씨는 예전 휴양객들의 빈자리를 현재는 아랍계 외국인들이 채운다고 말했다. 손님은 예전 같지 않지만 최 씨는 이름을 경북상회에서 '경북마트'로 바꾸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인천일보·인천도시역사관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