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인천을 빗기는 달은 번번이 이 섬 너머로 기운다. 그러므로 월미도(月尾島)로 하였다. 둑 위로 달밤에 산보를 하면 좋다.…"-〈동아일보〉 1923년 8월12일자. "…월미도는 인천부의 자랑거리일 뿐 아니라 경성과 인천을 아울러 한가지로 사랑을 받는 어여쁜 가인(佳人)이다.…"-〈개벽〉 1924년 8월호. "…월미도에는 달밤의 소나무 그림자와 해변 천막, 멀리서 깜박이는 등대 등 그냥 지나치기 아까운 것이 많다.…"-〈별건곤〉 15호 1928년 8월 "…월미도의 봄이 그리도 아름답다. 매일 수만의 남녀가 기차를 타고 와서 하루의 놀이를 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동아일보〉 1935년 5월4일자.
일제 강점기에 많은 신문과 잡지가 월미도를 예찬한 글이다. 그만큼 당시엔 숱한 사람이 몰려오는 관광지였다. 섬 둑길과 육지를 연결하면서 더 이상 섬이 아니었지만, 오늘날에도 습관처럼 월미도로 부른다. 1918년 철도국이 해수풀을 비롯해 해수를 덥힌 조탕(潮湯·공동목욕탕) 등을 시설한 임해유원지를 개발한 후 남녀노소 불문하고 월미도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1935년 무렵에는 만조 때 해상에 떠 있게 세운 용궁각(龍宮閣) 요정, 인접 해변에 지은 3층 건물의 빈(濱)호텔 등이 월미도의 유명세를 더했다. 그렇게 화려했던 월미도의 풍경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때 잿더미로 변하면서 사라졌다. 월미도 앞바다가 상륙작전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만든 월미도의 이면엔 이처럼 파란만장했던 한국 근대사의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국전쟁 이후 군부대가 접수한 월미산 일대는 오랫동안 시민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도 산 아래엔 횟집·놀이시설·상점 등이 즐비하지만, 월미도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월미산은 그렇게 홀로 서 있었다. 반면 시민 출입을 막았던 대신 월미산은 날로 푸르러졌다. 숲이 우거진 산엔 온갖 동식물이 자라면서 살가운 생태환경을 꾸렸다. 그러다가 1999년 말 군부대 철수로 월미산은 공원으로 변경하면서 다시 시민 품으로 돌아오게 됐다.
이런 월미산 둘레를 끼고 월미바다열차가 달린다. 인천역과 월미공원입구역 등 4개역 6.1㎞ 구간을 35분간 운행한다.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며 '애물단지'로 불리던 열차가 드디어 11년여 만인 지난 8일 개통했다. 1주일 만에 누적 탑승객 1만명을 돌파하면서 누차 제기됐던 만성적 적자 우려는 일단 씻는 분위기다. 열차는 서행하면서 관광객들에게 월미도와 내항, 인천 앞바다 등 이색적인 풍경을 즐기게 한다. 아무쪼록 인천과 월미도 역사·자연환경 등을 널리 알리는 '관광 지킴이'로 거듭났으면 한다.